3 김옥희(金玉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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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1960년 2월 27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대구시(大邱市) 비산동(飛山洞) 1구(區) 143
효부(孝婦) 김옥희(金玉姬) 32세

요즘 젊은이들은 효도(孝道)라는 개념을 “부모(父母)를 배불리 먹여 살리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좋은 옷과 풍부한 음식을 공양(供養)하고 있는 부유한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간혹 가정불화를 일으키거나 집을 뛰쳐나가고 있는 것은 이 같은 그릇된 관념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모(父母)를 섬기는데 있어 공경(恭敬)함이 없다면 어찌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인덕(仁德)을 기르는 근본(根本)”이라고 했다. 즉 부모(父母)에 대한 효(孝)는 여러 종류의 덕(德)을 가르는 근본(根本)인 것이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아가서 이웃을 자애하는 행위가 되며, 남을 자애하는 마음은 드디어는 생물을 사랑하는 정(情)으로 바뀌어, 밝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金씨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부모(媤父母)를 공양한 효부(孝婦)이다. 그녀가 겪은 10년간의 고난의 세월은 효도(孝道)하는 자애로운 마음이 없었다면 이겨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웃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金씨는 20세 때 국군 창설 요원(要員)의 한 사람이었던 육군 중령 최만식(崔萬植) 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30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고급 장교로 승진한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이었다. 해방 후의 혼란기 속에서도 金씨는 남편의 여유 있는 급료로 풍족한 신혼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호화로운 주택과 풍부한 물자, 약간의 권력마저 휘두를 수 있어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신혼생활이었다. 

2년간의 단꿈은 6.25동란이라는 민족적인 비극의 발발로 하루 아침에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모든 국민이 전쟁으로 절망을 겪었듯이 金씨도 견디어내기 힘든 절망을 체험해야 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최전방으로 배속된 남편은 다음해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전사(戰死)했던 것이다. 

호화롭던 2년간의 부(富)와 행복(幸福)은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이 나 슬픔만이 이 가정을 뒤덮었다. 70세 노시모(老媤母)와 며느리는 전사 통지를 받고 10일간이나 혼절한 채 절망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러나 계속된 공산군의 진격은 이 비극의 가정을 피난길로 몰아냈다. 노시모(老媤母)와 3살 난 외동아들을 동반한 피난길은 험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피난길이 고되면 고될수록 살아야 한다는 용기가 솟곤 했다. 

한 달이나 걸린 오랜 피난길에서 金씨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 호화롭던 과거의 행복을 말끔히 잊은 채 살아남은 가족을 자기 힘으로 살려야 한다는 굳은 결의로 가득 찬 용감한 여인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정착지인 대구(大邱)는 전국의 피난민들로 들끓어 일거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대구(大邱)는 그녀의 고향이었으나 가난에 쪼들려오고 있던 가족들은 아무도 金씨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특히 노시모(老媤母)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고 타이르곤 해 친척집의 구걸 행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金씨는 피난 짐 속에 간직해온 결혼 패물을 팔아 방 한 칸을 마련한 후 나머지 돈으로 두부 행상을 시작했다. 

호화롭던 고급 장교 부인이 3개월 만에 두부 행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용감하게 행상 길을 나선 것이다. 이같이 어려운 환경에 빠졌을 때 외아들을 돌보고 있는 노시모(老媤母)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金씨의 시모(媤母)에 대한 효성(孝誠)은 이 해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녀의 말처럼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은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일수록 더 깊게 솟아나는 모양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행상을 떠나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더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아침 8시쯤 다시 집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해놓곤 했으며, 밤늦게 귀가할 때는 시모(媤母)가 즐겨하는 과일을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겨우 끼니를 이어가야 하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시모(媤母)의 영양실조를 막기 위해 틈틈이 고기를 사 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고왔던 얼굴은 햇볕에 다 검게 그을렸으며 매끈하던 손이 거칠게 변했으나 그녀의 억척스러운 생활 전선은 지칠 줄 몰랐다. 

그녀의 고난을 안타깝게 여긴 친정 부모(父母)는 여러 차례 집을 찾아와 젊은 나이에 사서 고생을 하지 말고 개가(改嫁)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여자의 힘만으로는 가산(家産)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10여년의 오랜 세월 동안 계속 되어온 행상에도 생활의 변화는 없었으며 언제나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이었다. 

3년 전부터는 그녀가 지성으로 보살펴온 시모(媤母)가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되는 불행이 겹쳐왔다. 시모(媤母)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녀는 처음으로 친정의 도움을 요청해 명약(名藥)과 명의(名醫)를 찾아 나섰다. 3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치료에도 시모(媤母)의 병이 회복되지 않자 그녀는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도록 정성을 쏟고 있다. 

행상 도중에도 하루 10여 차례씩 집에 들러 시모(媤母)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시중을 들고 있다. 

그녀는 10년간 계속된 고난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시모(媤母)의 격려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자식이 부모(父母)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데도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수줍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