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옥순(李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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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울진군 후포면
열부(烈婦) 이옥순(李玉順) 36세

6남매(男妹)중의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國民學校)를 취업(就業)하고 가사(家事)를 돕던 이옥순(李玉順) 여사(女史)는 서울서 이발사(理髮師)로 종사(從事)하다가 폐결핵(肺結核)으로 귀향(歸鄕)하여 요양(療養)중(中)이던 김재환씨와 결혼(結婚)하여 갖은 고생(苦生)을 다 하면서도 남편(男便)을 하늘같이 받들고 또 가정생활(家庭生活)을 힘겹게 이끌어가고 있다. 

시댁(媤宅)에서 가까운 이웃집 단간방(單間房)에 쌀 16되 보리쌀 3되 좁쌀3되를 분가재산(分家財産)으로 물려받았을 뿐으로, 남편(男便)은 건강(健康)이 나빠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이여사(李女史)의 노동(勞動)품팔이로 생계(生計)를 겨우 유지(維持)할 수 있었다. 

1970년(年) 시가(媤家)인 영덕(盈德)에서 울진군(蔚診郡) 후포면(厚浦面)으로 이주(移住)하고 생활방도(生活方途)가 막연(漠然)하여 후포항(厚浦港)에 나가 생선(生鮮)을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행상(行商)을 하여 생활비(生活費)와 남편(男便)의 약(藥)값을 겨우 충당(充當)해 나갔다. 

폐결핵환자(肺結核患者)라는 이유(理由)로 셋방(貰房)을 얻는 데도 몇 차례씩이나 거절(拒絶)을 당(當)할 때는, 집 없는 설움에 눈물을 수없이 흘린 적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이를 악물고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努力)하고 저축(貯蓄)하여, 겨우 20만(萬)원짜리 오막살이집을 마련 했을 때는 부부(夫婦)가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좋다는 약(藥)은 다 보았으나 남편(男便)의 병(病)은 호전(好戰)되지 않고 날로 악화(惡化)되어 갔다. 

하는 수 없이 조약(造藥)을 어렵게 구(求)하여 써 보았으나 이도 역시 효험(效驗)을 보지 못하였다. 

남편(男便)은 자신(自身)의 병(病)이 회복(恢復)될 수 없는 것으로 체념(諦念)하고 삶을 포기(抛棄)한 사람처럼 난폭(亂暴)하여 침방(寢房)을 따로 함을 트집잡아 욕설(辱說)과 구타(毆打) 등 행패(行悖)가 날로 심(甚)하여 집에 친정부모(親定父母)는 이혼(離婚)을 요구(要求)했으나 이여사(李女史)는 자신(自身)의 희생(犧牲)으로 남편(男便)의 생명(生命)을 구(救)할 수 있다는 신념(信念)은 더욱 굳어져 그렇게도 힘겹게 사들인 두 마지기 논마저 팔아서까지 남편(男便)의 치료비(治療費)에 충당(充當)하였다. 

오랜 병석(病席)에 누워 있으니 엉덩이가 헐어 진물이 나고 바로 눕지도 못하고, 때로는 밤중에 심(甚)한 객혈(喀血)로 사경(死境)을 헤매는 남편(男便)을 업고 병원(病院)을 찾았으나 가망(可望)이 없다고 치료(治療)를 거절(拒絶) 당(當)할 때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때로는 남편(男便)은 유언(遺言)을 하고 시가(媤家)에서는 장례준비(葬禮準備)까지 한 적도 있었다. 정말 절망(絶望)의 순간(瞬間) 순간(瞬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 남편(男便)을 구(救)하겠다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1980년(年)부터는 부군(夫君)의 병세(病勢)가 차츰 호전(好轉)되고 있으니, 동민(洞民)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남편(男便)을 위하는 이여사(李女史)의 정성(精誠)에 하늘이 감응(感應)하였다고 칭찬(稱讚)하여 마지않고 있다. 

생계(生計)를 한 몸으로 담당(擔當)하고 있는 실질적(實質的)인 가장(家長)으로서 오로지 남편(男便)을 극진(極盡)히 받들고 모신 이여사(李女史)의 열행(烈行)이야말로 만여성(萬女性)의 귀감(龜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