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박순자(朴順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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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일군 죽장면
효부(孝婦) 박순자(朴順子) 29세

박순자(朴順子) 여사(女史)는 장녀(長女)로 태어나 1978년 20세가 되던 봄에 최용달씨와 결혼(結婚)하였다. 

차부(次婦)이면서도 7남매(男妹) 가정(家庭)의 실질적(實質的)인 맏며느리 약할(役割)을 하며 부모(媤父母)님을 모셔야 했다. 

시댁(媤宅)의 가정형편(家庭形便)은 식구(食口)는 많은데 가난하여 매우 어려운 사정(事情)이었다. 

남편(男便)은 소아마비(小兒痲痺)로 다리를 절므로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처지(處地)라서 이발소(理髮所)에 취업(就業)을 하고 연약(軟弱)한 여성(女性)인 자신(自身)은 700평의 농토(農土)를 소작(小作)하고 산(山)에서 약초(藥草)를 채취(採取)하여 시장(市場)에 내다 팔면서 가난한 생계(生計)를 겨우 이어가는 형편(形便)이었다. 

그 위에 불행(不幸)하게도 시부(媤父)님께서 영양실조(營養失調)와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눕게 되니 걱정이 태산(泰山)같았다. 

좋다는 약초(藥草)를 두루 채취(採取)하여 달여 드려 보았으나 별다른 효험(效驗)을 보지 못하였다. 생계(生計)를 꾸려 나가고 병간호(病看護)를 하는 등 가정사(家庭事)는 어렵기 한(限)없이 없었으나 이를 인고(忍苦)로써 극복(克服)하면서 성심(誠心)으로 시부(媤父)님의 환후(患候) 회복(恢復)에 효성(孝誠)을 다하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관절염(關節炎)으로 끝내 기동(起動)마저 불편(不便)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여사(朴女史)는 이에 좌절(挫折)하지 않고 애쓴 보람으로 이웃 어른들과 지방(地方)의 기관장(機關長)과 유지(有志)들의 도움을 입어 학교(學校)나 관공서(官公署) 그리고 가정(家庭)집 등에 우유배달(牛乳配達)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每日) 새벽에 일어나 수십리(數十里)길을 자전차(自轉車)로 달리어 골고루 배달(配達)을 마치고 피곤(疲困)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면 두 환자(患者)가 기다리고 있으니 박여사(朴女史)는 피로(疲勞)를 풀 틈이라곤 찾지 못한 채 바로 그 뒷바라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편(男便)은 점차(漸次) 관절염(關節炎)이 나아져서 새마을 이용소(理容所)를 차리게 되고, 그는 낮이면 틈나는 대로 이용소(理容所)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부(媤父)님은 박여사(朴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구환(救患)한 보람도 없이 그만 별세(別世)하게 되니 자신(自身)의 효친(孝親)의 정성(精誠)이 부족했던 소치(召致)라 자책(自責)하면서 애통(哀痛)을 금(禁)치 못하였다. 

예(禮)를 좆아 장례(掌禮)를 엄숙(嚴肅)히 치렀는데, 그 후(後)에도 돌아가신 시부(媤父)님을 못내 그리워하며 다소(多少)나마 속죄(贖罪)해야겠다는 마음에서, 매년(每年) 4월(月) 경로(敬老)잔치를 열어 마을 노인(老人)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마을의 대소(大小) 길흉사(吉凶事)는 자기(自己)일처럼 앞장서서 돕고 있다. 

동민(洞民)들은 박여인(朴女人)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과 경로심(敬老心)그리고 남편(男便)을 내조(內助)하는 정성(精誠)과 선린(善隣)의 정(情)에 감복(感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같은 시부(媤父)님에 대한 지극(至極)한 효심(孝心)과 다리가 비정상(非正常)인 남편(男便)과 어린 자녀(子女)들의 실질적(實質的)인 가장(家長)으로서, 곤경(困境)을 극복(克服)하고 꿋꿋이 살고 있는 박여인(朴女人)은 모든 사람의 귀감(龜鑑)이 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