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월화(李月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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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동
효부(孝婦) 이월화(李月花) 38세

이월화(李月花) 여사(女史)는 어려서부터 효심(孝心)이 지극(至極)하고 몸가짐이 단정(端正)하여 주위(周圍) 사람들로부터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더니 출가(出嫁)한 후(後)에는 시가(媤家)에서도 연로(年老)하신 시부모(媤父母) 봉양(奉養)이 지극(至極)하고 남편(男便)을 공경(恭敬)함이 정성(精誠)스러웠다. 

장녀(長女)로 태어나 초등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하고 가사(家事)를 돌보며 자란 이여사(李女史)는 1968년(年) 20세(歲)에 정복영씨와 결혼(結婚)하였는데 출가(出嫁)하자마자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을 못하고 와병(臥病)중(中)인 시부(媤父)님의 간병(看病)에 갖은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드려 용태(容態)를 살피고 한약제(漢藥劑)의 시탕(侍湯)은 물론, 좋아하시는 어육(魚肉)을 정성(精誠)스럽게 장만해 드리고 연소(年少)한 새댁의 몸으로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을 직접(直接) 받아내고, 배설물(排泄物)로 더럽혀진 의복이나 침구(寢具) 등을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 없이 제 때에 세탁(洗濯)하여 갈아 드리며, 환자(患者)의 방(房)을 항상 깨끗하게 하는 데 진력(盡力)하였다. 

이처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간병(看病)한지 10여년(餘年)이 지난 1981년(年) 봄에 시부(媤父)님께서 밤중에 갑자기 위독(危篤)한 증세(症勢)가 일어났을 때 마침 혼자였던 이여사(李女史)는 10km가 넘는 밤길을 등에 업고 군청소재(郡廳所在) 병원(病院)까지 가서 치료(治療)를 하였다.

그 보람으로 사활(死活)이 경각(頃刻)에 이르렀던 시부(媤父)님의 생명(生命)을 간신히 구(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성(至誠)으로 간호(看護)하던 중 시부(媤父)님이 지난 해 작고(作故)하시자, 이는 자신(自身)의 봉친(奉親)의 성(誠)이 모자란 소치(所致)라고 자책(自責)하며 단장(斷腸)의 애통(哀痛)을 누르지 못하였다. 

그 후(後) 빈소(殯所)에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림은 물론, 삭망전(朔望奠)을 예(禮)에 좇아 정성(精誠)껏 행사(行祀)하니 또한 칭찬(稱讚)이 고을에 파다(播多)해졌다. 

결혼(結婚) 벽두(劈頭)부터 근(近)20년(年)을 하루같이 불평(不平) 없이 화순(和順)한 표정(表情)으로 병중(病中)인 시부(媤父)님을 봉양(奉養)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리라. 지금은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남편(男便)을 도와 농사(農事)일도 힘껏 하고 있다. 

이여사(李女史)가 시부모(媤父母)님의 간병(看病)과 봉양(奉養)에 여념(餘念)이 없어, 몸에 배어 있는 효심(孝心)을 묵묵(黙黙)히 행동(行動)으로 옮기고 있으니, 슬하(膝下)의 4남매(男妹)도 이에 교화(敎化)되어 효행(孝行)과 우애(友愛)가 남달리 깊고 훌륭히 성장(成長)하였다. 

장남(長男)은 장학생(獎學生)으로 대학(大學) 재학(在學)중(中) 군(軍)에 입대(入隊)하여 병역(兵役)을 마치고 복학(復學)을 기다리고 있으며, 고등학교(高等學校)와 중학(中學)에 다니는 그 동생들도 학교(學校)에서 모범생(模範生)이니, 이는 곧 효부(孝婦)이자 현모양처(賢母良妻)인 그들의 훌륭한 어머니 이여사(李女史)의 산 행동교육(行動敎育)의 덕분(德分)이라 하겠다. 

이기(利己)와 방종(放縱)에 물들어 가정(家庭)의 윤리질서(倫理秩序)가 문란해져 가는 요즈음 세상(世上)에 이여사(李女史)의 이 같은 헌신적(獻身的)인 효행(孝行)은 모든 이에게 산 교훈(敎訓)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사(女史)의 행적(行績)은 세인(世人)의 사표(師表)가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