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전복순(全福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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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1987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점촌시 점촌동
효부(孝婦) 전복순(全福順) 58세

장녀(長女)로 태어난 전복순(全福順) 여사(女史)는 1946년(年) 21세(歲)로 박원태씨와 결혼(結婚)하였다. 

남편(男便)은 운전기사(運轉技士) 의용소방대원(義勇消防隊員)으로 일하며 3천여평(千餘坪)의 농토(農土)를 가진 중농(中農)으로 생활(生活)은 곤란(困難)하지 않아 그런 대로 행복(幸福)한 가정(家庭)살이를 꾸려왔다. 

그런데, 결혼생활(結婚生活) 1년(年)만인 1947년(年) 12월(月)에 진화작업후(鎭火作業後) 야식(夜食)으로 먹은 음식(飮食)이 잘못되었는지 복통(腹痛)을 일으켜 병상(病床)에 누웠다. 

김여사(金女史)는 임신(姙娠) 5개월(個月)의 몸으로 온갖 약(藥)을 구(求)하여 복용(服用)케 하고, 의원 (醫院)을 찾아 다니며 치료(治療)를 계속 했으나 회복(恢復)될 기미(氣味)없이 시름시름 앓더니 6개월후(個月後)에 그만 기세(棄世)하고 말았다.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위로(慰勞)하느라고 청상(靑孀)이 된 자신(自身)의 슬픔은 속으로 삼키면서 일절(一切) 내색(內色)하지 않았다. 뱃속에는 남편(男便)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낳으니 아들이었다. 

아들을 잃고 슬퍼하던 시부모(媤父母)님은 유복자(遺腹子)인 손자(孫子)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결혼(結婚)한지 2년(年)만에 남편(男便)을 잃고 혼인신고(婚姻申告)도 되지 않은 상태(狀態)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날이 막막(寞寞)하기만 하였다.

주위(周圍)에서는 개가(改嫁)의 유혹과 권유(勸誘)도 잇따랐으나 그 때마다 이를 물리치고, 시부모(媤父母)님을 두고 어떻게 나 혼자만의 장래(將來)를 위하여 떠난단 말인가. 

전여사(全女史)는 시부모(媤父母)님과 유복자(遺腹子)를 위하여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하기도 굳게 결심(決心)하였다. 

전여사(全女史)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종전(從前)보다 더욱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고 남편(男便)의 병(病)으로 인(因)하여 기울어진 가세(家勢)를 만회(挽回)하기 위하여,구멍가게, 채소장수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찾아 억척스럽게 일하여 가계(家計)가 약간 나아지려는 무렵에 시부(媤父)님께서 병(病)으로 눕게 되었다. 남편(男便)을 잃은 쓰라린 과거(過去)를 되새기며 어떻게 하든 시부(媤父)님의 병(病)을 고치려고 다짐하고 좋다는 약초(藥草)는 두루 캐어 시탕(侍湯)해 드리는 한편, 용하다는 의원(醫院)을 찾기도 하며 쾌유(快瘉)를 위해 백방(百方)으로 진력(進力)하였으나 별무효과(別無效果)였고, 용태(容態)가 위중(危重)해질수록 전여사(全女史)의 힘을 한결 필요(必要)로 했다. 그럴수록 더욱 지성(至誠)으로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할 따름이었다. 2년여(年餘) 동안 그렇게도 효성(孝誠)의 길을 다하였으나 그 보람도 없이 끝내 시부(媤父)님은 타계(他界)하였다. 

이제는 시모(媤母)님만이 남았다. 자식(子息)을 앞세우고 남편(男便)마저 잃은 노시모(老媤母)님에게 자신(自身)이 미처 못다한 효성(孝誠)을 다하겠다는 다짐으로 더욱 성력(誠力)을 다하니, 시모(媤母)님 또한 자부(子婦)의 갸륵한 효성(孝誠)에 고마운 정(情)이 들어, 고부간(姑婦間)이 마치 모녀(母女)같은 정(情)으로 화목(和睦)하니 감탄(感歎)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신혼(新婚) 2년(年)만에 남편(男便)을 여의고 시부모(媤父母)와 유복자(遺腹子) 하나만을 위하여 자신(自身)의 청춘(靑春)을 불사른 헌신적(獻身的)인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은, 주위(周圍)의 칭송(稱頌)만이 아니라 우리의 산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