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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平素)말이 적고 온순(溫順)한 성격(性格)탓으로 묵묵(黙黙)히 실천(實踐)하는 자신(自身)의 효행(孝行)을 당연(當然)한 사명(使命)으로 생각하여 실행(實行)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춘자(李春子) 여사(女史)이다.
1975년(年) 이른봄부터 중풍(中風)으로 병상(病床)에 누운 시모(媤母)님을 12년(年) 동안이나 한 번의 불평(不平)이나 얼굴찌푸리는 일 없이 한결같이 간호(看護)하여 왔다.
처음에는 이 병원(病院) 저 병원(病院)으로 용하다는 의원(醫院)으로 용하다는 의원(醫院)을 찾아 다녔으나 효험(效驗)도 못 보았으며 가난한 살림살이에 치료비(治療費)를 감당(堪當)해 낼 능력(能力)도 없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어지자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좋다는 약(藥)은 무엇이든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두루 구(求)하여 시모(媤母)에게 시탕(侍湯) 구환(救患)했으나 여전(如前)히 차도(差度)가 없었다. 때로는 번데기를 구(求)하여 삶아서 먹고 땀을 내게도 했고, 심지어는 대소변(大小便)의 맛과 냄새로써 환자(患者)의 상태(狀態)를 감지(感知)할 수 있을 정도의 의원(醫員)이 되다시피 하며 그 어려움을 감내(堪耐)하였다.
자고 나면 용태(容態)를 살피고 차도(差度)를 물었으나 별대답(別對答)이 없으므로 들리는 말로 대소변(大小便)의 맛으로 병(病)의 상태(狀態)를 알 수 있다기에 행동(行動)으로 옮겨 보았다.
이제는 분뇨(糞尿)의 맛으로 증세(症勢)를 감지(感知)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 의원(醫員)이 되다시피까지에 이르렀는데, 그 동안 어려움을 불평(不平) 한 마디 없이 성력(誠力)을 다하고 있다. 하늘이 탄복(歎服)할 효성(孝誠)이 아니고서야 이와 같은 효행(孝行)을 10여년(餘年)이나 바쳐 올 수 있겠는가, 다만 회복(恢復)하지 못하는 시모(媤母)님을 가슴 아프게 생각할 뿐이다.
한편 백화점(百貨店) 경비직(警備職)으로 격일제(隔日制)로 근무(勤務)하고 있는 부군(夫君)이 통장직(統將職)을 겸임(兼任)하고 있으므로 남편(男便)이 백화점(百貨店)에 출근(出勤)하고 없을 때면 통장(統將)일을 맡아, 통장(統將)의 임무(任務)를 충실(忠實)히 대행(代行)하는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시모(媤母)님의 간병(看病)에는 추호(秋毫)의 소홀(疎忽)함도 없었다.
병상(病床)의 시모(媤母)님과 3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가진 가정(家庭)을 꾸려나가기가 남편(男便)의 수입(收入)만으로는 감당(堪當)하기 너무 어려워서 가내(家內)에서 할 수 있는 검도복(劍道服)뜨기, 봉투붙이기 등의 부업(副業)으로 가계(家計)를 도우며 가계부(家計簿) 기록(記錄)과 저축(貯蓄)하는 일을 어김없이 실천(實踐)하고 검소(儉素)한 생활(生活)과 성실(誠實)한 자세(姿勢)로써 항상 계획성(計劃性)있는 생활(生活)을 해 왔다.
그러면서도 자녀(子女)에게는 효행(孝行)이 백행지본(百行之本)임을 몸소 보여 주는 행실교육(行實敎育)과 가정윤리교육에도 꾸준히 힘쓰고 있다.
이와 같이 어렵고 고된 가정(家庭)살이를 해 가면서도 동리(洞里)에서는 반상회 운영(運營)에도 앞장서서 헌신(獻身)하여 실질적(實質的)인 모범반상회(模範班常會)를 운영(運營)하고, 나아가 주민(住民)의 화합(和合)과 저축운동(貯蓄運動)을 발전(發展)시켜 모범반(模範班)으로 끌어 올렸고 불우(不遇)이웃돕기 운동(運動)을 주도(主導)하여 47회(回)에 걸쳐 15만(萬) 7천(千)원을 모금(募金)하여 통내(通內)의 불우(不遇)한 이웃을 돕고 위로격려(慰勞激勵)하는 등, 인내(忍耐)와 용기(勇氣)로 역경(逆境)을 슬기롭게 극복(克服)하는 수범(垂範)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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