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정화(李丁和)

페이지 정보

본문

제31회(1988년 4월 22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금릉군 감천면
열부(烈婦) 이정화(李丁和) 61세

6.25 전쟁이 몰고 온 비극의 여주인공이 마치 이정화(李丁和) 여사(女史)인 것 같다. 

가난한 공가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1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오던 중, 1949년 22세 때 결혼하여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부모(媤父母)님 모시고 시남매(媤男妹)들과 고생스러웠지만 그런 대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채 1년을 넘기지도 못하고 6,25전쟁이 일어나 남편은 자원하여 육군에 입대하였는데 강원도(江原道) 화천지역(華川地區)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비보(悲報)를 접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통곡밖에 자위(自慰)의 길이 없었으나 자식을 앞세운 시(媤)어른 앞에서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시부모(媤父母)·시동생·시누이·유복자(遺腹子) 등 여덟 식구의 대가족 생계를 어떻게 할까가 당장의 걱정이었다. 

신혼의 달콤한 1년이 마침 꿈만 같았다. 

잊으려고 애를 쓰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도와 10여 두락(斗落)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나라를 위해 장열(壯熱)히 산화(散華)한 남편의 아내답게 꿋꿋이 살아갈 것을 수없이 다짐하였다. 

젊은 미망인 이여사(李女史)는 외로움을 밤마다 눈물로 달래며 쓸쓸하고 애달픈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아들이 점점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대견하고 보람인 것이었다. 

교육열이 남다른 이여사(李女史)는 시(媤)동생 두 사람을 만류하시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설득하여 전답을 팔아가며 대학교육을 시켜 사회의 훌륭한 역군으로 진출시키고, 시(媤)누이 2명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출가(出嫁)시키는 등 형으로서의 남편을 대신하여 할 바를 완수하였다. 

이와 같은 시남매(媤男妹)의 뒷바라지를 마치니 아들의 교육이 남았는데 학비 부족으로 앞날이 캄캄했지만 품앗이와 소작농 등 피땀 어린 고생 덕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시켜 사회의 중견인물로 활약할 수 있게 하였다. 

시부모(媤父母)에 대한 효성(孝誠) 또한 지극하여 시모(媤母)님께서 1977년에 갑자기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병간호가 얼마나 정성스럽고 한결 같았던지 인근에서 칭송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2년 동안의 극진한 간호에도 시모(媤母)께서는 별세하고 말았다. 그리고 1년 전부터는 80 고령의 시부(媤父)께서 노환(老患)으로 계시니 간호와 출입 시중에 육순 (六旬) 노인이 정성을 쏟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부모를 애타게 그리는 고아들의 마음을 자신의 지난날과 같이 생각하여 1985년에 네 살된 고아를 양녀(養女)로 입적시켜 친자식처럼 키워 따뜻한 부모의 정을 느끼게 하고 있다. 

23세에 청상(靑孀)이 되어 괴롭고 외로웠던 이여사(李女史)가 한 평생을 말없이 꿋꿋이 살아왔을 뿐 아니라, 헌신적으로 시남매들을 교육시키고 시부모에 바친 지극한 효도는 만고의 사표(師表)가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