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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화(南順花) 여사(女史)는 결혼 당시 안동군 길안면 용계동에 있던 시가(媤家)가 안동(安東)댐 공사로 인하여 집단 이주하게 되어 남편의 친구를 따라 고령군 다산면의 현 주소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주 당시 재산이라고는 하나 없이 맹인 남편과 2남 2녀를 거느린 남녀사(南女史)로서는 정말 막막하였다.
하루 세 끼를 이을 수 없을 만큼 어려웠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모든 것이 자기의 운명이려니 여기고 열심히 일하는 도리밖에 달리 길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 나갔다.
노동판의 일을 비롯하여 들일, 집일, 진일, 궂은일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이 마음 상할까봐 어려운 내색도 하지 않고 별로 힘들지 않다며 남편을 위로하며 갖은 고충을 겪으며 이겨 나갔다.
남여사(南女史)의 생활태도가 이와 같이 너무도 진지하고 착실하며 또한 불구 남편에 대한 모든 뒷바라지가 너무나 진실하여 인근 부락민이 모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시외가댁에서는 너무나도 알뜰하고 특히 불구 남편을 받드는 데 정성과 순종의 도(道)를 다함에 감동하여 약간의 농토를 사 주었다.
여기에 힘 입어 더욱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결과 내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항상 떨어져 사시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직접 모시고자 소원을 했으나 끝내 허락을 못 받자 매월 서신으로 빠짐없이 문후(問候)를 드리고 용돈까지 우송하는가 하면 모시지 못함을 끝내 죄책하며 뉘우치던 남여사(南女史)는 시부모(媤父母)께서 1987년 봄에 졸지에 별세하고 마시자, 이에 100일간을 애통해하면서 어렸을 때 배워 익혔던 부도(婦道)에 따라 예(禮)를 다하니 인근 주민의 칭송 또한 자자하였다.
건강한 신체를 타고 난 남여사(南女史)는, 남자가 하기에도 힘든 농사일을 해내고, 자녀를 부양하면서 일편단심(一片丹心) 남편이 광명을 찾는 것만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억척같이 일하여 저축한 돈으로 남편을 인도하여 서울의 실로암 안과의원까지 가서 개안수술을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치료비로 인하여 저축금은 동나고 남편의 길잡이가 되어 돌아오는 그의 심정은 필설(筆舌)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어려운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역경을, 강인한 의지와 각고(刻苦)로 극복하면서 맹인남편을 받들기에 성실한 부도(婦道)를 다할 뿐 아니라, 실명을 되찾아 주려는 높은 열행(烈行)은 실로 장(壯)하다 아니할 수 없으며, 뭇 사람의 귀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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