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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연(琴星連)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여 11살에 실모(失母)하고 엄부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 23세 때, 박씨가(朴氏家)로 출가(出嫁)하였다.
시가(媤家) 역시 빈한(貧寒)함이 어린 시절의 친가의 가난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말을 더듬는 남편과 기울어져 가는 초가(草家)에서 천수답(天水畓) 400평으로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노시부모(老媤父母)와 시(媤)동생, 그리고 시(媤)누이 등 6명의 가족이 살아가려니 뼈를 깎는 듯한 가난과 씨름을 해야 했다.
천품(天稟)이 워낙 근면하고 생활력이 강한 그녀는 불평 없이 감내(堪耐)하여 언젠가는 남부럽지 않는 가정을 이룩하리라는 희망과 신념으로 살았다.
신혼 초부터 진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도맡아 하고, 시(媤)동생과 시(媤)누이의 부양을 부모 대신으로 맡아 애지중지하며 우애로써 가정의 화목을 꾀하고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히 모셨다.
자신의 괴로움이나 고달픔은 내색하는 바 없고, 언제나 시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데 갖은 애를 썼다.
피나는 내핍생활로 1980년에 23평의 반양옥을 지을 수 있었다.
신혼 당시의 희망과 신념이 현실화되어 가니 가슴 뿌듯한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한다. 그 기쁨도 한 순간뿐, 시부(媤父)님께서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됐다.
이에 금여사(琴女史)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이름난 의원을 다 찾아다니면서 구환(救患)하였다. 언젠가 좋다는 약(藥)을 구하러 밤길을 바삐 가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쳐 왼쪽다리에 마비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과 불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거동을 못하는 시부(媤父)님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시중든 지 3년이 넘었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83년 3월에는 태어날 때부터 정신박약 및 소아마비로 행동이 부자유스럽던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시(媤)동생 또한 불의의 사고로 왼쪽 팔을 못쓰게 되었지만 1년여의 극진한 치료 끝에 완쾌시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주었다.
가환(家患)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에는 시모(媤母)님께서 속병을 앓게 되니 온갖 약(藥)을 써 보았으나 별무효과(別無效果)였는데 음식선택 및 조절이 최선이라는 말에 따라 다른 가족들과는 별도의 음식으로 2년여에 걸친 극진한 시봉(侍奉) 끝에 쾌유 단계에 이르러 80 고령의 시(媤)어른 내외분은 점차 건강을 되찾아 가사를 돌보시니 약간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빈곤한 가정살이에 연이은 불행으로 지출이 컸으므로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금여사(琴女史)의 시부모(媤父母)를 시봉(侍奉)하는 효행(孝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2,100평이 미구(未久)에 옥답이 될 것을 희망으로 오늘도 이들 부부는 땀을 흘리고 있다.
역경을 무릅쓰고 시부모(媤父母)를 지성으로 섬기며 내일을 위하여 화목하게 살아가는 금여사(琴女史)에게 그 누가 칭송을 보내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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