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송덕금(宋德金) 여사(女史)는 두메마을 농가의 5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남들은 국민학교에도 다니지 못 하는 마을이었지만 자신은 학교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나 큰오빠의 잘못으로 가세가 말이 아니게 기울어지면서부터는 어렵게 살면서 자랐다.
1958년 20살이 되던 해에 언니가 불행(不幸)하게도 나병(癩病)에 걸리고 부산(釜山)에서 격리요양을 받게 되었다.
송여사(宋女史)는 언니의 간병차 요양원에 출입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은 불구자(不具者)들의 손발이 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여사(宋女史)가 자신의 결심을 이웃들에게 이야기하였던 바, 이웃의 소개로 당시 대구(大邱)의 애락원(愛樂院)(나환자 수용소)에서 수용치료를 받고 있던 현재의 남편 황상범씨와 맞선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하여 일그러진 손과 마음의 아픔을 치료하며 평생의 반려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그 뜻을 여쭈니 예상대로 극구 반대하시기에 송여사(宋女史)는 일시 마을의 갈피를 잡지 못하였으나 언니의 처지에 비하면서 우리 가족도 겪고 있는 불구자의 한(恨)을 자신의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삶과 용기를 주는 희생자의 길을 택하게 해 주십사고 간청으로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1961년 친가에서 조촐한 혼례식을 올렸다.
시모(媤母)께서는 이미 타계(他界)하였고 연로하신 시부(媤父)님과 불구자인 남편을 위한 고생스런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부(媤父)께서는 한학자(漢學者)로 농사일을 할 줄 모를뿐더러 문경향교(聞慶鄕校)의 장의(掌議)로서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결혼 2년째 되던 해에 시조부(媤祖父)님께서 ‘당증’이라는 허벅지를 쓰지 못하는 병(病)에 걸렸다.
좋다는 약(藥)은 만리(萬里)를 무릅쓰고 구하여 시탕(侍湯)하고 병원치료도 받았으나, 연속 재발이 됨에 치료비가 모자라서 약을 구하여 직접 주사하기도 하였다.
그 간병하는 효성(孝誠)은 너무나도 지극하여 주위에서 알게 되고 1년 2개월 만에 시조부(媤祖父)님의 병(病)이 마침내 쾌유(快瘉)되니 이웃의 찬사와 칭송이 대단하였다.
이와 같이 자진해서 불우한 환자를 배우자로 맞아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奉仕)하는 열행(烈行)과 시조부(媤祖父)님을 시봉(侍奉)하는 효성(孝誠) 또한 각별한 한편, 검소한 생활과 각고의 노력으로 6,000여평의 전답을 마련하여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자녀교육에도 특별히 힘써 대학까지 교육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진출케 했으며, 한편으로는 마을 부녀회장 일까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송여사(宋女史)의 이같이 보기 드문 효행(孝行)과 불우한 사람을 위하는 자기 희생정신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
- 이전글제31회 효행상(孝行賞) 이분녀(李粉女) 25.06.12
- 다음글제31회 효행상(孝行賞) 금성연(琴星連) 25.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