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김임순(金任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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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1988년 4월 22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칠곡군 왜관읍 낙산동
효부(孝婦) 김임순(金任順) 28세

불구를 가엾게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그의 아내가 되고 나아가 시모(媤母)에게 효성(孝誠)을 다하는 젊은 여성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임순(金任順) 여인(女人)이다. 

김여인(金女人)은 찢어 질 듯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여섯 식구의 생계가 어렵자 9세때 고향인 문경(聞慶)을 떠나 왜관읍(倭館邑) 낙산(洛山洞) 이모(李某)씨의 집에 고용(雇傭)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국민 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을 8년여를 연속해 오다가 17세 때에 주인댁에 볼일로 자주 들르는 소아마비로 두 목발로 기어다니는 불구자를 보고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 내가 그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도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 부모님께 그 와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청했으나 예측한 대로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설득 간청, 애원으로 겨우 승낙을 얻어 1977년에 현 남편인 김종길(金鍾吉)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19세란 연령 차이데다 불구자이며 찢어질 듯이 가난한 집안에 시집왔다고 친지는 물론, 이웃 사람들이 동정과 멸시로 대해 왔으나 김여사(金女史)는 이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살았다. 

남편을 위하여 자신을 내던진 김여인(金女人)은 시모(媤母)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뛰어나 무엇하나 불편하지 않도록 정성으로 시봉(侍奉)을 하였다. 

그런데 시모(媤母)님은 평소 잔병으로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화순(和順)한 얼굴로 극진한 봉양(奉養)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를 가까운 친척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니 오히려 송구하게 여기며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며 겸손해 할 뿐이다.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과 남편에 대한 순종 등이 갸륵하며 문중에서 전답 1,000평을 묘위답(墓位畓)으로 경작케 하여 그의 생활을 돕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여섯 식구의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많아서 김여인(金女人)은 1년의 절반 이상을 남의 과수원 논밭 등의 품팔이에 힘을 쏟고 있다. 

결혼생활 11년의 세월 동안, 남들처럼 좋은 음식. 고운 의복, 그 흔한 놀이의 맛도 모르고 오로지 남편과 시모(媤母)님 모시기와 자식들을 위해 몸바쳐 온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렇게 바쁜 몸이면서도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남 먼저 협조하는 미덕도 갖추고 있는 김여인(金女人)! 

불구(不具)의 남편을 자청해서 맞아 그의 손발이 되고, 시모(媤母)님에게는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로서 헌신적인 성력(誠力)을 다하며, 어려운 가계를 꾸리며 슬하의 두 형제를 위해서는 우애롭고 장(壯)한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다하니, 김여인(金女人)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온 고을에 메아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