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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익힌 예절과 효행(孝行)을 배운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순대(金順大) 여사(女史)이다.
김여사(金女史)는 16년전 23세 때 박씨가문(朴氏家門)으로 출가(出嫁)하여 대가족을 이끌어 갈 종부(宗婦)로서 효도(孝道)·가화(家和)·예절(禮節)·근검(勤儉)으로 생활하며,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지성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였다.
시부모(媤父母)님에게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대하며 방이 추운지 더운지, 의복이나 침구는 어떠한지, 음식은 어떠한지 잠시의 외출 이라도 마음으로는 노약한 시(媤)어른을 생각하며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 지성으로 시봉(侍奉)하니 이웃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결혼 당시 대가족인 시가(媤家)에는 겨우 430평의 전답뿐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근면과 절약생활에 몸에 배어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농사일은 물론, 틈나는 대로 품팔이나 산채캐기를 하고 농한기에는 새끼도 꼬고 장날에는 노점상을 하면서 내핍(耐乏)과 저축으로 지금은 2,500평을 경작하는 중농으로까지 올려 놓았다.
김여사(金女史)는 검소하고 절도 있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이 났을 뿐 아니라, 가화(家和)에 힘써 화기에 찬 명랑한 가정으로 만들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편 자녀들도 어머니의 철저한 예의범절을 본받아 동리에서나 학교에서 모범학생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화목하게 살아가는데 4년 전부터 시부(媤父)님께서 갑자기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김여사(金女史)는 만사를 제쳐놓고 시부(媤父)님의 병(病)구완에 전념하였다.
어려운 살림살이였음에도 구애치 않고, 사방으로 약(藥)을 구하고 약초나 산채를 고향에까지 가서 채취하여 시탕(侍湯)해 드리고, 거동을 못하는 시부(媤父)님의 대소변을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받아내면서 단 한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이 없었고, 의복이나 침구의 세탁과 방 청소는 물론, 간식과 음식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여 간병하였다.
4년 동안 그렇게도 애쓴 보람도 없이 1988년 2월에 시부(媤父)님께서 별세하시니, 애통 속에 예(禮)를 따라 경건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 후, 홀로 남게 된 시모(媤母)님을 더욱 공경하고 봉양(奉養)하여 추호의 불편도 없도록 정성으로 모시고 있으며, 남편과 1남 2녀의 가정에 결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명랑하고 일찬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시부모(媤父母)에게 항상 내훈(內訓)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효성(孝誠)을 다한 김여사(金女史)에 대하여, 효부(孝婦)의 전형이고, 만인의 귀감이라 하며 사회에서 힘찬 갈채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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