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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란(張正蘭) 여사(女史)는 18세 때 유씨가문(柳氏家門)에 출가하여 영세농가의 찌든 가난 속에서 2남 2녀를 낳고 살아왔다.
그녀의 남편은 방탕한 성격으로 가사는 돌보지 않고 도박과 여흥에만 빠져 가정형편은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정은 자신의 팔자 탓으로 체념하고 짜증스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시부모(媤父母)의 봉양(奉養)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의 뒷바라지에 힘쓰면서 어린 자식들을 잘 기르는데만 전념하면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 또한 성질이 별났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착한 며느리(張女史)를 칭찬은커녕 오히려 심하게 구박한다고 원성의 대상으로까지 될 정도였으나, 장여사(張女史)는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라곤 없이 시모(媤母)님을 지성으로 봉양(奉養)하고 순종하는 것만으로 일관해 왔다.
자식들은 다 자라서 성취(成就)시켰으나 각기 직장 따라 뿔뿔이 헤어지고 지금은 95세의 노시모(老媤母)님과 장여사(張女史)가 살고 있는데 1982년 시모(媤母)님께서 노환으로 눕게 되었다.
백방으로 완쾌에 성력(誠力)을 다하였으나 원체 고령인지라 차도가 없고, 현재도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병(病)구완에 진력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3년전에는 남편마저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니 칠순(七旬)의 노구를 이끌고 큰방, 아랫방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두 분의 대소변을 받아 내고 시탕(侍湯)과 세탁 등으로 묵묵히 간병에 전념하였다.
혼자의 힘으로 산적한 일을 처리해 나가자니 힘에 겨워 쓰러진 때가 수없이 많았음을 볼 수 있었다고 주위사람들이 말한다.
그렇게 애쓴 보람도 없이 작년 9월에 남편이 타계하니 자신이나 시모(媤母)님의 처지가 너무나 기막혀 장여사(張女史)의 애통해 하는 모습은 문상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눈과 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모(媤母)님께서는 며느리인 장여사(張女史)의 정성이 모자라고 병(病)구완을 잘못하여 아들을 죽게 했다고 나무라며 연속하여 며느리를 구박하고 있는 형편이니 주위사람들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장여사(張女史)는 그렇게도 억울한 심정을 혼자 속으로 삭이면서 원망하는 기색도 없이, 화순(和順)한 얼굴로 한결같이 묵묵히 시모님의 간병을 극진히 하고 있으니 그 효행(孝行)이야말로, 우리 한국며느리의 전통적 효친의 본보기라 하겠으며, 세상 며느리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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