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차희순(車熙順) 여사(女史)는 1966년 최씨가문(崔氏家門)에 출가(出家)하여 종부(宗婦)로서 어려운 환경에서나마 맡은 소임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시부모(媤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뛰어나 인근에서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았다.
논 1,500평의 농사였지만 시부모를 받들며 남편과 더불어 4남매를 키우며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시모(媤母)님께서 노환으로 신음하시게 되매 백방으로 구약(求藥)하여 병(病)시중에 정성을 다했으나, 1971년에 세상을 뜨시니 애통(哀痛)속에 예(禮)를 따라 장례를 치르고 시봉(侍奉)의 효(孝)를 다 하였다.
시모(媤母)가 별세하고 시부(媤父)께서 홀로계시니 그 외로움을 달래 드리려고 애를 쓰고 시부(媤父)에 대하여 한층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구나 시부(媤父)님께서는 6년 전부터 중풍으로 수족을 쓰지 못하고 거동마저 불능하게 되니 차여사(車女史)는 대소변을 받아 내고 약을 시탕(侍湯)하고 병간호에 자식된 효(孝)를 다하였다.
식사도 떠 드려야 하고, 목욕과 이발도 해 드리고, 의복이나 방의 청소 등의 시중으로 촌가(寸暇)의 틈도 없는 몸이면서도, 자녀의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시부(媤父)님의 구환(救患)과 시봉(侍奉)에 정성을 다하면서 남편과 함께 자녀들과 열심히 살아가던 중, 1985년에 남편이 불의(不意)의 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렇게 의지하여 살아오던 가정의 기둥이 넘어지니 전신의 맥(脈)이 빠지고 현기증이 일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좌절(挫折)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아들을 잃은 시부(媤父)님과 자식들을 위하여 일신을 바치겠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다.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지, 저렇게 잘 자라고 있는 자식들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병드신 시아버님은 어디에 희망을 걸고 살아 갈 것인가?' 시부(媤父)님의 심회(心懷)가 어떨까라고 생각 할수록 불쌍하기만 했다.
따라서 차여사(車女史)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시부(媤父)님 모시기에 정성(精誠)을 쏟아야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차여사(車女史)는 허탈에 빠지고 병고에 시달려 주름진 시부(媤父)님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더욱 더욱 힘을 다해 봉양(奉養)하겠으니 아버님! 오래오래 사십시오'라고 마음으로 기도(祈禱)하면서 묵묵히 간병과 시봉(侍奉)에 전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흥부락(新興部落)의 부녀회장직을 맡아 봉사(奉仕)하는 정신으로 임하고 있으며, 불우이웃돕기,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의 고취 등 모든 이의 앞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범효부이고, 4남매의 자녀를 훌륭히 키우고 있는 장(壯)한 어머니로서 이웃의 칭송(稱頌)이 자자하다.
- 이전글제31회 효행상(孝行賞) 남무임(南武任) 25.06.12
- 다음글제31회 효행상(孝行賞) 박영순(朴永順) 25.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