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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무임(南武任) 여사(女史)는 1956년 23세 때 결혼하여 시부모(媤父母)님 모시고 슬하(膝下)에 2남 3녀를 두어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고된 농사일이었지만 농사를 천직으로 삼고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과 알뜰하게 절약해서 사는 만큼 가세(家勢)도 늘어가니 정말 사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던 중, 그렇게도 믿음직하던 남편이 불행하게도 신장염(腎臟炎)으로 자리에 눕게 되니, 단란하던 가정에서 암운(暗雲)이 덮은 듯이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좌절(挫折)하지 않고 여러 병원과 갖은 치료방법으로 정성을 다하여 쾌유(快瘉)의 길을 찾느라고 무던히 애썼으나 애통(哀痛)하게도 1973년 끝내 타계하였다.
전도(前途)가 너무나 암담(暗澹)하여 방향을 잃을 것도 같았으나 시부모(媤父母)님과 자식들을 생각하여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과 사별한 지 2년 뒤에 시부(媤父)님께서 노환으로 별세하시니 애절한 비통(悲痛)을 삼키면서 예(禮)를 모아 엄숙히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연로하신 시모(媤母)님과 5남매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농사일을 비롯하여 모든 일을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모(媤母)님께서는 노환으로 자주 병석에 들게 되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고 아침에는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해 드리고 매일 목욕을 시켜 드리면서 건강을 살피는 등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와 봉양(奉養)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사의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매사를 시모(媤母)님께 여쭈어서 처리하니 비록 병중에 있으니 자부를 의지하고 신뢰(信賴)하여 며느리의 말이면 크게 신임케 되니 가내가 두루 평온하였다.
그리고, 남편 없는 가정이 넉넉할 수 없겠으나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자녀교육에 힘써서 장남은 전문대학까지 마치고 공직자로 종사하는 역군이 되었고 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출가시키거나 사회에 진출시키고 있다.
한편, 남여사(南女史)는 인정미도 풍부하여 이웃 돕기 운동에 남달리 관심을 가지고, 각자(各自)의 시모(媤母)님 봉양(奉養)에 부녀회원 전원이 적극 참여하여 자녀들에 수범(垂範)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의지할 곳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외로이 사는 부락민 정씨(鄭氏)에게는 부녀회에서 수시로 도와 주도록 하고 있다.
여자의 몸으로 논 1,200평과 포도원(葡萄圓) 1,400평을 직접 경작(耕作)하는 근면한 억척부인이며, 자녀들에게는 장(壯)한 어머니이고, 시부모에게는 지극한 효부(孝婦)여서 인근 마을에서까지 남여사(南女史)의 훌륭한 인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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