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윤달식(尹達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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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1988년 4월 22일)
효행상(孝行賞)
대구직할시 수성구 중동
효부(孝婦) 윤달식(尹達植) 64세

18세에 강씨(康氏) 문중으로 출가(出嫁)한 윤달식(尹達植) 여사(女史)는 시가(媤家)의 가난한 살림살이로 어렵게 살아왔으나 주어진 운명으로 생각하고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면서 남편을 섬기며 아들딸을 낳고 평범하게 살아왔다.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가정은 언제나 화목(和睦)하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예절에 어긋나는 행실(行實)은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라온 윤여사(尹女史)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세인(世人)이 본 받을 만한 일로써 시(媤)어른을 공경(恭敬)하고 순종하며 극진히 시봉(侍奉)하는 일들은 주위에서 칭송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77년에 남편이 중풍으로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대소변을 받아 내고 한약(漢藥)으로 시탕(侍湯)하는 등 병간호(病看護)에 몰두하다 보니, 생계가 절로 위협을 받게 되어 윤여사(尹女史)는 행상으로 이를 보충하며, 시모(媤母)님의 걱정을 위안하면서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자니 지칠 대로 지쳤으나 '참고 견뎌야지, 내가 쓰러지면 우리 가정은 파멸(破滅)이다.'라고 다짐하면서 억척스럽게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극진한 간병의 보람도 없이 3년간의 신음 끝에 남편이 운명하고 말았으니 하늘도 무심하다고 원망도 하였으나 노시모(老媤母)님 앞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애통(哀痛)해 한다는 것은 자식을 앞세운 노모의 심경에 더욱 슬픔을 자극하는 불효라 생각하고, 자신의 슬픔은 혀를 깨물며 참아내고 오히려 의연(毅然)한 태도로 시모(媤母)님을 위로하기에 애썼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삼키면서 고부간(姑婦間)에 서로 인생(人生)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며 마치 모녀간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그러나 워낙 고령인 시모(媤母)님께서 2년 전부터는 이상비대증(異常肥大症)으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용변(用便)도 부자유스러우니 이를 받아 내며 생계를 위한 가장(家長)역에다 간호역이란 이중의 역(役)을 하면서 정성들여 모시고 있는데, 윤여사(尹女史) 자신도 고희(古稀)가 멀지 않아 이마에 닿을 노인이라, 육중한 시모님을 연약한 노파(老婆)의 힘으로 간호(看護)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생활환경(生活環境)속에서도 1남 1녀의 자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 아들은 결혼하여 부산(釜山)에서 산업의 역군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딸은 어머니를 도와 가며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갖은 역경 속에서도 굴(屈)하지 않고 꿋꿋이 해쳐 나온 윤여사(尹女史)는, 오늘도 묵묵히 구환(救患)에 정성을 다하고 있음에 효부(孝婦)로서의 칭송(稱頌)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