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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원(申台元) 여사(女史)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갑을제(甲乙悌) 선생의 후손으로서 전형적인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부덕(婦德)을 익히며 4남매 중의 외동딸로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 한학(漢學)에 발고 엄격한 조부(祖父)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효부(孝婦)로서 칭송의 바탕을 이루었던 것이다.
신여사(申女史)가 21살 때 중매로 순천박씨(順天朴氏)인 박노석씨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시가(媤家)는 신여사(申女史)결혼 직후 고향인 칠곡군(漆谷郡) 가산면(架山面)의 전답 800평과 집을 팔아서 현 거주지에 대지 14평에다 건평 12평의 조그마한 시멘트 블럭 건물로 마련한 것이 당시의 시댁(媤宅) 재산의 전부였다.
시댁은 아주 빈한(貧寒)한 농가(農家)였고 남편은 1남 4녀 중의 맏이였으며 시부(媤父)는 일찍
타계하였다.
남달리 교육열이 높았던 시모(媤母)님께서는 남의 품삯일과 김쌈 등으로 고생하면서 외아들인
신여사(申女史)의 남편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는데, 당시에도 구직난이 오늘과 같았다.
1961년 경찰관으로 공채된 후 영천군(永川郡) 청통(淸通) 지서장(支署長)을 비롯하여 13개 벽지지서장으로 전전하여 근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편의 박봉(薄俸)으로 중풍인 시모(媤母)님의 약값과 생활비 등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시매(媤妹)에게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를 맡기고 자신은 온갖 행상을 하여 시누이와 시동생의 출가 뒷바라지까지 하였다.
시모(媤母)님께서는 중풍에다 11년 전부터는 심한 노인성정신병(老人性精神病)으로 거동이 불가능하여 오늘도 대소변을 받아내고 병간호를 함에 여념이 없다.
신여사(申女史)는 10여년 전부터 만성위염을 앓고 있는 처지인데도 이 날까지 한결같이 시모(媤母)님의 손발이 되어 시중에 진력(盡力)해 왔다.
남편은 빈번한 임지이동으로 전남(全南) 화순(和順)경찰서(警察署)를 초임지로,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전전하였기에 함께 생활할 기회라곤 거의 없었다.
30년 동안을 남편없이 세대주로 지내면서 한결같이 불평 한 마디없이 시모님을 모시며 남녀들의 교육도 맡고 가사를 도맡아 공직자인 남편을 내조(內助)해 왔다.
사회의 일각에서 공무원의 성실(誠實), 청백성(淸白性)이 강조되는 이즈음, 남편 역시 신여사(申女史)가 맡고 있는 가정을 안심할 수 있어 모범경찰관으로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한다. 이는 오로지 신여사(申女史)의 높은 부도(婦道)와 희생적인 내조의 결과라 하겠다.
자기 희생정신과 출중(出衆)한 효행(孝行)과 훌륭한 부덕(婦德)은 오늘의 여성사회에서는 물론, 나아가 공직자 부인사회에서 만인의 귀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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