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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선(安(泰仙) 여사(女史)의 시모(媤母)는 10년 전부터 중풍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
병세는 심하여 반신불수(半身不隨)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매, 안여사(安女史)는 대소변을 받아내고 식사의 시중부터 자질구레한 일에 이르기까지 시모(媤母)님의 손발이 되었다.
시모(媤母)·남편·다섯 자녀 등 8인 대가족의 뒷바라지는 예사 일이 아니었다.
1980년부터는 중풍으로 와병중(臥病中)인 시모(媤母)님의 치료를 위하여 백방(百方)으로 수소문(搜所聞)하여 약(藥)을 구입, 치료하는 한편 본인은 팔공산과 그 주위의 산들을 두루 헤매면서 약초를 채취하여 시탕(侍湯)하였으나 고령인 탓인지 효험이 없자 우선 건강회복이 앞서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위해 보신(補身)에는 개구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추운 겨울에 산간계곡(山間溪谷)에서 얼음장을 깨고 개구리를 잡아다가 보신시키고 있는데 지난 1985년 1월에는 계곡에서 미끄러져 발목골절상까지 입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산야(山野)를 누볐다.
안여사(安女史)의 일과는 시모(媤母)님의 대소변 처리와 식사 시중으로 시작되었으며 시모(媤母)님의 소외감(疎外感)이나 무료(無聊)함과 심리적인 불안초조감(不安焦燥感)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는 다섯 남매들로 하여금 집에서는 조용하게 지내게 하고, 아침 문안을 꼭 드리게 하며 집안의 어른으로서의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대가족을 거느리고 영세농가(零細農家)로서 항상 생계를 돕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와 자녀들의 등교준비를 끝내 주고는 남편과 함께 과수원(果樹園)에 나가 일을 해야 하며 하루에 6차례 이상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를 위하여 집을 드나들고 있는데 이 정경(情景)을 본 동민들은 안여사(安女史)의 말없는 한결같은 효심(孝心)에 감탄할 뿐이었다.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정신이 투철한 그는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가훈을 ‘충효(忠孝)·성실(誠實)·근면(勤勉)'으로 하여 철저하게 가르쳐 5남매가 모두 성실하고 효심(孝心)이 강하다.
위로 두 아들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유망한 사회인으로 진출하였으며, 두 딸도 고등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취업하는 등 자녀들도 이들 부모의 효성(孝誠)과 근면(勤勉)·성실성(誠實性)에 교화(敎化)된 보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동리에서 청소년이나 주민교육의 기회에는, 안여사(安女史)의 극진한 효행(孝行)을 산 교재로 하여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오늘도 묵묵히 시모(媤母)님의 쾌유(快瘉)와 장수(長壽)를 염원하고 정성을 다하는 안여사(安女史)의 효심에, 하늘이 감응하여 그의 앞날에 많은 축복이 있으리라고 주위에는 덕담(德談)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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