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김찬주(金燦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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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1988년 4월 22일)
효행상(孝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상리2동
효자(孝子) 김찬주(金燦圭) 19세

학업(學業)에만 열중해야 할 나이, 어린 학생의 신분으로서 사사를 돕고 병중에 있는 모친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이웃의 찬사(讚辭)를 듣고 학교에서 효행상(孝行賞)을 수여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찬규(金燦圭)군이다. 

김(金)군은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의지할 곳이 없는 불구 외조모(外祖母)모두 합쳐 5인 가족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10년 전부터 앓아 온 어머니의 관절염이 6년 전부터는 병세가 악화되어, 혼자 힘으로는 문밖 출입을 할 수 없는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었다. 

이에 백방(百方)으로 약(藥)을 구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效驗)이 없었다. 

치료비와 약값 등으로 가세는 더욱 어려워지고, 부친은 실의에 빠져 있던 중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실직까지 하여 가세는 말이 아니게 어려워졌다.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며 1년 동안 외조모와 모친의 병간호(病看護)를 계속하였다. 

1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얻어진 돈으로 병구환에 충당하면서도 푼푼이 저축한 돈으로 경상공고(慶尙工高)에 진학하였다. 

학업생활만으로도 힘드는데, 불구이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침 저녁의 식사준비와 외조모, 모친 두 환자(患者)의 시중에다가 대소변(大小便) 처리까지 하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 외에 더러운 옷가지의 세탁도 때맞춰 해내야 했다. 

그러나 불평 한마디 않고 얼굴 찌푸리는 일 없이 두 환자에게 마음 편하게 해 드리는 일에까지 신경을 골고루 쓰면서 시봉(侍奉)에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민학생인 여동생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학업생활(學業生活)에도 열심이며 방과후(放課後)에는 두 어른의 시중에 바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날로 인근에 알려져 칭찬이 대단하고, 학교생활에서도 품행(品行)이 단정하고 모든 일에 솔선하여 타의 모범이 되며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므로, 1986년 어버이날에는 학교에서 효행상(孝行賞)을 받은 바 있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가세(家勢) 중에서 학업에 열성을 다하고 심지어 방학 때는 공사장의 막노동까지 하면서, 외조모와 모친의 두 환자에 지성(至誠)으로 시중들며, 가족들의 식사준비와 세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사를 도맡아 해내면서, 어린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역경에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어린 학생가장 김찬주(金燦圭)군의 지극한 효성에 찬사와 격려를 보내지 않을 사람 뉘 있으랴. 

고진감래(苦盡甘來)로 그의 앞날에 서운(瑞雲)이 반드시 올 것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