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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홍주군(石鴻洙君)은 가난한 가정이었으나 부모와 두 형과 단란(團欒)하게 살아왔는데, 석군(石君)은 3세 때 모친(母親)을 여의고 매사에 그렇게도 활동적이던 아버지마저 원인 모를 불치(不治)의 병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방안에 들어앉게 되자, 문밖 출입(出入)마저 불가능(不可能)해 졌고,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 내야 하는 처지(處地)가 되었다.
13세 된 맏형은 막연히 집을 떠나고, 11살 된 둘째 형도 대구(大邱)로 떠나 가족은 뿔뿔이 헤어져 와병(臥病)중(中)인 아버지와 9살난 자신 두 사람만이 남게 됐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석군(石君)은 남의 집 심부름이나 소를 먹이거나 풀을 뜯어 주고 밥을 얻어 아버지에게 가져와 나눠 먹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빨래도 하는 등, 어린 고사리손으로 어른이 하기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고생 끝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남의 집 일을 해 준 품삯을 모아 아버지 병환(病患)에 좋다는 약을 두루 찾아 구해 드렸으나 보람도 없이 효험(效驗)은 전혀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바깥에서 일하는 자신은 단 한 켤레의 장갑도 사 쓰지 않으면서, 방(房)안에 계시는 부친(父親)에게는 따스한 내의를 마련해 드리고, 명절(名節)에는 고기 국을 끊여 드리는 일은 물론, 간식을 사다 드리는 등 그야말로 지성(至誠)으로 시봉(侍奉)하니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이런 일을 이 젊은이에게 누가 가르치거나 시킨 일도 아닌데······. 이는 하늘이 내린 효자(孝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형제 가운데서도 유독 홍주(鴻洙)군이 선천적(先天的)으로 효(孝)를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부친 시봉(侍奉)과 가난을 해쳐 나가기에 촌가(寸暇)도 없으면서, 도열병과 벼멸구가 기승을 부릴 때는, 어느 동민이 건강이 나빠 논 600평에 병충해(病蟲害) 방제(防除)를 못해 애태우는 것을 본 석(石)군이, 자기 경운기(耕耘機)와 분무기(噴霧器)로 농약을 살포해 주기도 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미덕(美德)도 실천하고 있다.
병고에 시달리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앉은뱅이 부친의 쾌유(快瘉)를 하늘에 빌며, 쓰러져 가는 이 가정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일으키겠다는 의지(意志)는 대단하여, 지금은 논 500평을 빌어 참외농사에 전념(專念)하여 굳건하게 자립(自立)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현재 지역방위병(地域防衛兵)으로 근무하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홀로 계실 아버지의 식사를 마련하여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 놓고, 근무지에 출근하고 있는 그의 효성(孝誠)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어린 나이에 감당(堪當)하기 힘든 가사(家事)를 도맡고 11년간에 걸친 끈덕지게 갸륵한 이 효행(孝行)에 대하여 주위에서 찬사(讚辭)를 보내지 않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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