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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필(金炯弼)씨는 강원도(江原道) 도계읍(道溪邑)에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片母膝下)에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라다가 22세에 결혼(結婚)하여, 찢어지는 듯한 가난 속에서 부부(夫婦)는 앞날의 희망(希望)을 바라보면서 알뜰하게 살아왔다.
김(金)씨는 견디기 어려운 가난 속에서, 남편마저 사별(死別)하고 자신 하나만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온 모친을 생각하면, 내 몸이 괴롭고 어떠한 역경(逆境)이 몰아치더라도 어머니에 대하여 효성(孝誠)을 다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도리(道理)인 것으로 마음깊이 새기고 있었다.
남편이 그러하니 여필종부(女必從夫)라, 김(金)씨 부인 또한 시모(媤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다.
어려운 가정생활에서 여덟 식구를 거느리기가 어려워서 강원도(江原道)에서 지금의 영주시(榮州市)로 이사를 오게 되어, 600여평을 소작하면서 채소를 가꾸어 장사를 하는 한편 막노동으로 대식구(大食口)의 생계(生計)를 꾸려왔는데, 어릴 때부터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1983년부터는 신병(身病)으로 막노동마저 할 수 없게 되니, 생활이 더욱 막연해져 부인의 구멍가게로 생계를 겨우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런 역경에서도 경로심(敬老心)이 강한 김형필(金炯弼)씨는, 1983년 갈 곳 없이 문절걸식(文節乞食)하던 팔순(八旬) 노인 강대윤씨에게 방 한 칸을 마련하여 침식 제공(提供)은 물론, 깨끗한 의복으로 모시고 있으니 가난하기가 짝이 없는 처지이면서도 그와 같은 적선(積善)에 이웃은 물론 인근부락(隣近部落)까지 칭송(稱頌)이 자자하다.
그러던 중 1985년부터는 칠(七)순의 노모께서 지병(持病)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니, 매일같이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잠시도 곁을 떠날 줄 모르고, 간병(看病)에 정성을 다하는 이들 부부의 효심(孝心)은 인근부락까지 소문이 널리 퍼졌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와병중(臥病中)인 노시모(老媤母)님의 구환과 아홉 식구의 생계, 그 외에 강노인의 뒷바라지가 힘에 너무 겨워서였는지 부인이 신병(身病)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정성그러운 남편의 간병(看病)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한(恨)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니, 한쪽 팔을 잃은 듯한 외로움과 슬픔에 몸부림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김(金)효자는 자신의 불편한 몸을 가누면서 여덟 식구의 가장으로서, 오갈 데 없는 강노인을 모시면서, 노모님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을 비롯하여 구환(救患)에 따른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서투른 남자의 솜씨로 간병(看病)하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가족(家族)이 아닌 팔순(八旬) 노인까지 합한 8인 가족의 뒷바라지까지 오늘도 감당하고 있으니, 모든 사람이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 지극한 효행, 자애로운 경로선행은 만인(萬人)의 사표(師表)라고 한결같이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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