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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훈씨는 영천에 세거하는 오천정씨인데, 10대 조부(남호 정수강)와 5대 조부(정치규)는 출천의 대효이고, 5대 조모 의성김씨도 역시 높은 부덕을 가졌으며 부군 따라 순절하신 뛰어난 열부로서, 조선 순조 때 명신 류치명 선생의 정제문집과 영양지 등 여러 문헌에 조상의 훌륭한 효열의 사적이 소상히 등재된 명문의 후예이다.
'왕대밭에 왕대나고 효자문에 효자난다'는 옛말을 실증이나 하듯, 공의 5대손 정동훈씨 또한 이름난 효자이니 어찌 이를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효자는 영천군 화북면 온천동 두메산골에서 정환철씨와 안동권씨부인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두 돌이 지났을 때 생부모 슬하를 떠나 재종숙부 정환채씨에게 출계되었는데, 상기 정치규 효자의 5대봉사 자손이 되었다. 당시 양가에는 연로하신 양조부모와 양모, 본인 등의 4명으로 단출한 식구였음에도, 생활은 산간벽촌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양모 여강 이씨부인은 16세에 출가하여 19세에 망부한 청상이었으나, 정동훈씨의 입양으로 인생의 희망을 가졌으며, 양조부모께서도 기뻐하여 활기 띤 새로운 가정 분위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효자가 9세 때,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양조부께서 별세하시니, 철없이 영문도 모르면서 승동의 상주가 되어 초종장을 고례에 따라 받들었다.
그 후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어린 나이에 사실상의 호주가 되어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산으로 가 땔감을 준비해야 했고,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 산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먹는 등의 생활을 하며, 결혼할 때까지 직접 조석을 지어 칠순의 양조모와 육순의 병석 노모를 봉양해야만 하였다.
찢어질 듯한 가난한 집안이지만 누대 봉사손이므로 제사가 잦아, 어린 나이면서도 형편대로 지성으로 봉제사하면서 가정살이를 꾸려 나갔다.
가세가 이러하니 어느 처녀가 시집을 오려 하겠는가? 그래서 29세 때 월성이씨인 오늘의 이위자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등교육을 못 받았으나, 주경야독식으로 한자를 익히며, 필요한 지식을 자학자습하여 사회생활에 별로 구애 없는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늦게나마 손부를 맞이하게 된 조모님께서는 기쁨을 못 이겨 눈물을 짓기도 했다. 평생 자기만을 믿고 살아온 조모님께 손자 내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나마 한결같이 효성을 다했으나, 노환으로 신고하시던 끝에 1973년 향년 90세로 타계하였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양모가 우연히 안질로 눕게 되매, 병원·약방 등을 두루 찾으며 백방으로 치료에 힘썼으나, 효험도 없이 끝내 완전 실명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빚만 지게 되어 전재산인 논 500평을 눈물을 머금고 팔아서 빚을 청산하고 튼튼한 몸이 있으니 도시에 나가 노동이라도 하여, 병환에 계시는 양모님의 치료비 마련과 가정살이를 꾸려 나가겠다는 결심으로, 부부가 의논 끝에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영천시내로 이주하였다.
막노동 등 일자리를 찾아 다니며 생활을 했으나, 실명한 노모에다 어린 남매가 딸렸는지라 셋방얻기가 너무 어려워 세 차례나 이사를 하였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마침 시내에 사는 생가모친이 병환에 계셔 그 간병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생모·양모를 번갈아 가며 만남을 견디면서 정성으로 구환하였으나, 생모께서는 3년 전에 그만 작고하니 주위에서 출중의 효자라 칭송해 마지 않는다.
생부 정환철씨는 대외적으로 지역사회에 신망이 두텁고, 성실·후덕한 인품으로 향리 영천군 화북면에 건국 후 초대 민선면장에 당선되어 2회 연임한 분이며, 가정적으로는 자녀교육에 철저하여 슬하의 2남 4녀가 하나같이 효행과 우애가 뛰어났다. 이로 보아 정효자는 비록 출계로 인해 어려서부터 양가에 별거하였으나, 오늘의 인격형성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부모의 훌륭한 훈도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고도산업사회의 핵가족 풍조가 팽배하여, 최고교육을 받은 지식인도 생부모를 천대하는 예가 비일비재한 이 때, 국졸 학력인 정효자는 '부모은중경'이나 '효경'의 가르침을 알지는 못하나, 스스로 터득하여 역경을 극복하고 실천하여 장한 효행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렇듯 그의 효성이 지극하니 하느님도 무심치 않아 현재 작은 규모이나 양돈업을 하여, 생활에 큰 어려움 없이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정효자는 15년간이나 노양모를 지성으로 시봉해 왔으며, 백발이 성성한 오늘도 앞못보는 노양모의 지팡이가 되어 마음 편안하시도록 모시고 있으니, 그 행적은 만인의 귀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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