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서규분(徐桂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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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경산시 사학동
효부(孝婦) 서규분(徐桂粉) 62세

서규분(徐桂粉)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가의 장녀로 태어나서 학교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꽃다운 나이 17세에 지금의 남편 강도원씨와 결혼하였다.

서여사(徐女史)는 강(姜)씨 문중의 종부(宗婦)로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시동생 6명과 시누이 2명의 대가족(大家族)이 한 집에서 살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살아왔다.

더욱이 남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데다가 온갖 질환(疾患)으로 가정살림에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서여사(徐女史)가 가장(家長)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넉넉한 가정이라도 시동생 6명과 시누이 2명을 성혼시키고 분가(分家)해 주고 출가시키려면 어려운데 찢어지게 가난한데다가 남편마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니 서여사(徐女史)의 고난이야말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서여사(徐女史)는 시부모님의 봉양(奉養)과 시누이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힘을 다 바치느라고 자기자식 6남매의 건강관리에는 소홀하고 등한시해서 1977년에는 넷째 아들을 잃고 이듬해 78년에는 장남을 영양실조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연달아 두 아들을 잃게 되었다.

서여사(徐女史)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비할 때가 없었으나 손자를 잃고 슬퍼하는 시부모님을 위로하기에 바빴고, 남은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짐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가세(家勢)를 일으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과 인고(忍苦)의 세월 속에 1986년 뜻 밖에도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수족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서여사(徐女史)는 눈앞이 캄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나 정신을 차려 식사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 손수레에 태워 2개월 동안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지성으로 간병(看病)한 보람이 있어 지금은 상당히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서여사(徐女史)는 몸은 하나인데 시아버지의 병간호(病看護)를 해야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여사(徐女史) 자신도 이제는 6순이 넘는 늙은이고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쇠약해졌으나 아침 저녁으로 시부모(媤父母)님께 문안드리고 온전하지 못한 남편의 뒷바라지와 식구들의 생계(生計)를 꾸려가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

이러한 서여사(徐女史)의 지극한 효성(孝誠)에 마을 사람 모두가 감복(感服)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