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황경희(黃京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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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1991년 4월 25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안동시 니천동
효부(孝婦) 황경희(黃京姬) 55세

황경희(黃京姬) 여사(女史)는 1944년 18세 때에 김영규씨와 결혼했으나 워낙 시가(媤家)의 가세가 가난하여 남편은 막노동을 하고 갓 시집온 새댁이지만 이웃집 농사일 또는 빨래를 하는 등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황경희(黃京姬) 는 신혼 초부터 그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연로하신 양시어머니 김성홍(89세) 여사를 모시고 살아왔는데 슬하에 2남 2녀의 자녀를 두게 되자 생활이 더욱 쪼들리게 되어 약간의 이자돈을 비려 행상(行商)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정한 점포(店鋪)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행상을 한다는 것을 매우 어렵고 힘드는 일이지만 황여사(黃女史)는 피나는 노력으로 장남은 대학을, 그 밖의 자녀들도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열심히 산 결과 자식들은 착하게 성장했고 취직을 한 장남은 결혼시켜 살림까지 내주었고, 두 딸도 출가시켰으니 참으로 장한 어머니라 하겠다.

그런데 1980년부터 양시어머니께서 우연히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황여사(黃女史)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온갖 약을 구해다가 시봉(侍奉)하는 한편, 식사의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고 양시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서 모든 시중을 들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84년부터 남편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몸져 눕게 되었다.

황여사(黃女史)는 양시어머니와 남편의 병구완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모든 정성을 다 바쳐 병간호(病看護)에 일념하였다.

장남이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취직(就職)하기는 했으나 아직은 집에 돈을 보태어 줄 처지가 못되고 해서 지금도 황여사(黃女史)는 농사철이 되면 농사의 품팔이를 하고 때로는 채소장사를 하면서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부정(不正)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도 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하는 옳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황여사(黃女史)는 착하고 좋은 일만 하였는데도 불행은 왜 자꾸 따라 다니는지?

이와 같이 결혼 초부터 가난을 극복(克服)하기 위해서 날품팔이와 막노동을 하고 10년이 넘도록 앞 못 보는 양시어머니의 병간호와 남편의 병수발을 들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황여사(黃女史)의 효행(孝行)과 열행(烈行) 그리고 장(壯)한 어머니의 상(像)은 전통윤리가 퇴색(退色)해가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귀감(龜鑑)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