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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걸(金道乬)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69년 20세 때에 8남매의 장남(長男)인 김관덕(金寬德)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시댁(媤宅)은 산간 다락논 천평과 소작농(小作農)으로 열 식구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다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해야하니까 결혼 초부터 날마다 바쁜 생활로 몸이 지칠대로 지쳤으나 자랄 때 친정(親庭)어머니의 효(孝)에 대한 엄한 훈계(訓戒)를 상기해서 가난을 극복(克服)하고 잘사는 가정(家庭)을 이룩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근검절약(勤儉節約)했다.
그래서 조금 생활이 나아지자 워낙 가난하여 희망(希望)을 가지지 못했던 시댁(媤宅) 식구들이 조금씩 활기를 띠고 의욕적(意慾的)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여사(金女史)가 결혼한 후에 얻은 첫 애기부터 셋째에 이르기까지 2남 1녀가 하나같이 들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제때에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하고 젖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생긴 영양실조(營養失調)였기 때문이다.
가슴에 한(恨)이 맺힌 김여사(金女史)는 셋째 시동생이 객사(客死)하자 조카를 입양(入養)시켜 친자식처럼 양육(養育)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시아버지의 지병(持病)인 위장병에 좋다는 약은 신약이거나 한약이거나 구해다 드리고 10년 동안 음식을 조절(調節)해서 극진히 병구완(病救援)을 했으나 노환(老患)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5년 전부터 평소에 건강(健康)하시던 시어머니가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식사의 시중과 대소변의 처리며 세수와 목욕 등 환자(患者)의 모든 시중을 들고 특히 병실(病室)을 청결(淸潔)하게 청소해 놓았기 때문에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노는 놀이터가 되어 있으며 막내 손녀는 할머니 방에서 생활하면서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어머니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30리가 넘는 선산읍의 장날마다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을 지켜보는 지역주민의 모든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다.
남편은 청각장애자(聽覺障碍者)이지만 3남 2녀 모두 교육시켰고 이제는 시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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