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박자이(朴者伊)

페이지 정보

본문

제35회(1992년 4월 24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경주군 산내면
효부(孝婦) 박자이(朴者伊) 61세

박자이(朴者伊) 여사(女史)는 1948년 5월 17세 때에 한영채씨와 결혼하여 다복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 당시 남편은 초등학교 교사(敎師)였으며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 등 모두 일곱 식구가 화목(和睦)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1950년 시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남편 한영채씨는 경찰관(警察官)으로 직을 옮기게 되어 청도군 각북, 각남, 동곡 등의 지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51년 7월에 역시 경찰공무원(警察公務員)으로 근무하던 시동생이 상주(尙州)의 전투(戰鬪)에서 전사(戰死)하고, 이어 53년 1월에는 남편이 청도군 각북지서에서 순직(殉職)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여사(朴女史)는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2살짜리 아들의 어머니로서 청상(靑孀)이 되었다.

불과 3년 동안에 건장한 아들 둘을 잃은 박여사(朴女史)의 시아버지(한원택)는 절망하여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고 결국 가산을 모두 탕진(蕩盡)하고 말았다.

박여사(朴女史)는 눈물로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평소에 알뜰하게 저축(貯蓄)해 두었던 돈과 친정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도박(賭博)으로 날려버린 논 1천평을 다시 찾게 되었다.

박여사(朴女史)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자식 하나 바라보고 어떻게 살겠느냐고 재혼(再婚)을 권했지마는 단호히 거절하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했고 지금은 결혼시키고 분가(分家)해 주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2년이 지난 1952년에 새시어머니(당시 32세)한 분을 모셨는데 박여사(朴女史)와 연령 차이는 불과 열 살 밖에 안되지만 198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37년 동안 시어머니로서 대접하고 극진(極盡)히 모시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박여사(朴女史)를 효부(孝婦)라고 칭찬했다.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親戚)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앞장 서서 돕는 박여사(朴女史)는 집안 사람들로부터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 칭찬을 받고 있다.

박여사(朴女史)는 아들이 행여나 애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고 남의 지탄(指彈)을 받을까봐 엄하게 교육시키고 1973년에 공무원시험(公務員試驗)에 합격하여 현재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으며 손자 손녀들도 모두 착하게 자라고 있다.

늘그막에 편할 나이가 되었는데 90년부터 시아버지(한원태·90세)가 노환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박여사(朴女史)는 평소 지병인 관절염의 고통도 숨긴 채 지금도 지극정성(至極精誠) 간병(看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