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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연(李香淵) 여사(女史)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 했으나 엄격(嚴格)한 가정교육(家庭敎育)을 통해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차질(蹉跌)을 갖추어 영양남(南)씨 집에 출가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시아버지의 후처(後妻)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1981년 겨울에 남편이 과로로 몸져 눕게 되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남편은 간경화증이라는 진단이 내렸다.
남편의 병은 노동을 해서는 안되고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내야 하므로 이여사(李女史)는 남편 대신에 가업(家業)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여사(李女史)는 3년 동안 간경화에 좋다는 약은 어디든지 가서 구해 와서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했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슬하에 혈육(血肉)이 없어 의지할 곳이 없는 시어머니가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고 손잡고 만류하여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봉양(奉養)하고 있었는데 89년 3월에 갑자기 노환(老患)에다가 중풍까지 겹쳐 쓰려졌다.
이여사(李女史)는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한 시어머니께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중풍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달여 드리고, 끼니 때마다 식사 시중은 물론이고 대소변(大小便)의 처리와 목욕을 시켜 드리고, 더럽혀진 옷을 갈아 입히고, 이부자리의 빨래 등 시어머니 손발이 되어 정성껏 병구완을 하는 한편, 힘드는 가사를 돌보면서도 짜증을 내거나 불평하는 일없이 간병(看病)하였다.
이러한 이여사(李女史)의 효행을 보고 이웃 사람들은 모두 출중(出衆)한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이여사(李女史)는 또 시어머니께서 시부(媤父)님의 후처로 오기 전까지는 일본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호적(戶籍)이 없고 정확한 연령도 알 수 없는 형편이라서 호적에 등재(登載)하기 위해서 관계기관을 찾아 다니면서 노력하고 있다.
이여사(李女史)는 84년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여자 혼자의 힘으로 문중 토지를 소작(小作)하면서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시어머니의 수발을 들고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서 지금은 2남 2녀가 모두 고등교육(高等敎育)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진출시켰다.
이와 같이 이여사(李女史)는 시어머니를 지극정성(至極精誠)모시고 중풍(中風)의 병구완을 5년째나 성심성의로 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장(壯)한 효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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