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성복(金成福)

페이지 정보

본문

제37회(1994년 4월 21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안동시 니천동
효자(孝子) 김성복(金成福) 47세

김성복(金成福)씨는 안동의 농촌마을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들이 모두 객지(客地)로 떠났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김성복(金成福)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가세(家勢)가 기울어져 중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으나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생계가 어렵게 되자 김(金)씨는 안동시내에 있는 철공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강원도 탄광(炭鑛) 등지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생 끝에 푼푼이 모은 돈을 가지고 고향(故鄕)에 돌아온 것이 25세 때였다.

고향에 돌아온 김성복(金成福)씨는 논밭을 사고 한우(韓牛)도 사 들여 열심히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병원에서 만성위종양(腫瘍)이라는 진단(診斷)이 내렸고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성복(金成福)씨는 이때부터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유명한 의원과 약국을 찾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구해다 드리고 영약(靈藥)을 구하기 위해서 산과 들을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10여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약을 구해서 달여 드렸더니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라 병세가 차츰 차도가 있어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김(金)씨의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고 모두가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어머니의 병환(病患)이 회복된 지 2년이 채 못된 어느 날 아버지가 노환(老患)에다가 중풍이 겹쳐 몸져 눕게 되었다.
김(金)씨는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식사 시중과 하루에도 몇 차례나 대소변을 받아 내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4년 동안 내색하지 않고 병수발을 하였으나 1989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성복(金成福)씨는 6형제의 막내이면서도 부모님을 모시고 어머니의 병구완을 10년이 넘도록 했고 또 아버지의 병수발을 4년 동안이나 해 온 효자로서 92년에는 경북도지사로부터 효행상(孝行賞)을 받기도 했으며 20여년 간 농촌의 지역사회개발에 헌신적(獻身的)으로 봉사(奉仕)하는 한편, 청소년 선도(善導)에도 앞장 서온 선행자(善行者)이다.
이러한 김(金)씨의 효행과 선행(善行)에 지역주민들은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