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김귀임(金貴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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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1996년 4월 24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문경시 모전동
효부(孝婦) 김귀임(金貴壬) 58세

김귀임(金貴壬)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부(農夫)의 딸로 태어나서 1954년 꽃다운 나이 16세 때에 박원화(朴元和)씨와 결혼하여 시어머니를 모시고 슬하(膝下)에 2남을 두고 화목(和睦)하게 살아왔다.

김여사(金女史)의 남편 박원화씨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해서 대성광업소(大成鑛業所)에서 막장 일을 했다.

그렇게 살아오던 중, 몇 해 전에 시어머니께서 중풍(中風)으로 쓰러졌다.

막노동을 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처지(處地)이지만 병원(病院)에도 가고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시탕(侍湯)하고 정성껏 병구완(病救援)을 했으나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不能)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대소변 처리와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고, 더럽혀진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여 간병(看病)하고 있는데 게다가 고령(高齡)이라서 치매증까지 겹쳤으니 말 못할 고충을 겪고 있다.

그런데 3년 전에 광업소(鑛業所)의 폐광(廢鑛)으로 남편이 실직하게 되어 가계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김여사(金女史)가 한국전력공사의 청소부로 취직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維持)하고 있다.

남편은 실직 후에 오랫동안 막장 노동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진폐증(塵肺症)이 생겨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몸을 지탱(支撑)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직장에 나가면서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수발을 함께 들어야 하니 그 고충(苦衷)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여사(金女史)는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은혜(恩惠)에 보답하고 남편에 대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간병(看病)하고 있다.

김여사(金女史)의 두 아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효도(孝道)하는 길은 공부를 부지런히해서 부모님 걱정을 덜어 드리고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 두 사람이 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여 재학(在學)하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효부(孝婦) 집에 효자(孝子)났다고 칭송(稱頌)이 자자하다.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은 모든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며 그의 앞날에 영광(榮光)이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