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영희(金永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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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1961년 2월 25일)
독행상(篤行賞)
영양군(英陽郡) 영양면(英陽面) 서부동(西部洞)
효부(孝婦) 김영희(金永喜) 31세

어렸을 때부터 가난 속에서 살아온 김(金)씨는 결혼 후에도 숙명적으로 따라다니는 가난과 역경을 쉽게 극복하고 있다. 

18세에 결혼, 아들 하나를 얻어 가산(家産)을 일으켜가고 있던 김(金)씨 가정에 6·25동란은 비극을 몰고 왔다. 51년 군에 입대한 남편이 다음해 전사한 것이다. 

80 고령의 시모(媤母)가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김(金)씨는 “손자를 위해 잘아야 한다.”며 시모(媤母)를 위로할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여자였다. 

재산이라고는 밭 5백 평이 전부였으나 밤낮으로 일을 해 가난을 조금씩 몰아냈다.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기도 했으며 괭이를 들고 논밭을 일구기도 했다. 

89세의 시모(媤母)가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며느리를 돕고 있는 것이 金씨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1년에 서너 번씩 보약을 마련하는 등 시모(媤母)의 건강에 신경을 쏟고 있지만, 시모(媤母)가 앓아 눕는다면 그녀의 가난을 몰아내려는 노력은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사별(死別)한지 7년째인 57년부터 김(金)씨의 가정은 가난에서 해방됐다. 무(無)에서 유 (有)를 창조해낸 억척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