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남규(鄭南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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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1961년 2월 25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월성군(月城郡) 안강읍(安康邑) 옥산리(玉山里) 1구(區) 9
효부(孝婦) 정남규(鄭南奎) 36세 [본관(本貫) 오천(烏川)]

일제(日帝)의 압제와 6.25동란 등 계속된 민족적인 시련을 겪으면서 몰락 직전에 있던 이름 있는 유가(儒家)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젊음을 희생한 장한 며느리이다.

정(鄭)씨가 살아온 20년 동안의 시집살이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으나 그녀는 어려서부터 익혀온 효(孝)의 정신을 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험한 세파(世波)를 차례 차례 정복할 수 있었다. 

정(鄭)씨는 17세 때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15대손 이기동(李基東) 씨와 결혼했다. 퇴락해가고 있던 유가(儒家)의 살림은 권위만 남아 있을 뿐 견디어나기 힘들만큼 가난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3년 동안에 가난을 체험하면서 이 가문에 흐르고 있는 효(孝)의 정신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었다. 

비극의 서막은 그녀에게 너무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몰려 왔다. 어느 날 건강하던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와 자리에 눕더니 심한 열과 설사를 일으키면서 중태에 빠졌다. 

놀란 가족들은 마지막 남아 있던 손바닥만한 박토(薄土)까지 팔아 치료의 길을 찾았으나 허망하게도 남편은 발병 20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손 하나 없이 20세의 청상과부로 남겨진 그녀는 쏟아져 내려오는 절망을 이겨 내지 못해 1달간이나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힘겹게 모셔야 할 시조모(媤祖母)와 시부모(媤父母), 그리고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이 전부였다. 

절망의 수렁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던 그녀의 머리맡에 어느 날 시조모(媤祖母)가 찾아와 엄중한 질책(叱責)의 말을 남겼다. “너는 이름 있는 이(李)씨 가문의 전통을 고수(固守)해야 할 맏며느리다. 李씨 가문을 지켜 나갈 자신이 없으면 하루 빨리 이 집을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숨진 남편을 위해 몰락한 李씨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은 무서운 용기를 솟아나게 했다.

처음 겪는 중노동을 서슴없이 해냈다. 모내기, 벼 베기, 밭매기, 삯바느질, 빨래품 등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서자 이웃과 시부모(媤父母)는 양가(良家) 규수의 체면을 깎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鄭)씨는 배를 굶으며 큰소리치는 옛날 양반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신성한 노동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李씨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는 자기의 신조(信條)를 묵묵히 지켜 나갔다.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식량을 마련해오는 정(鄭)씨에게 시모(媤母)는 아늑한 친모(親母)의 품과도 같았다. 시모(媤母)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며느리를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었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에게 또 다른 슬픔이 3년 후에 찾아왔다. 그녀가 가장 가깝게 믿고 의지했던 시모(媤母)가 갑자기 타계(他界)한 것이다. 병마(病魔)는 이렇게 연약한 여인에게 끓임 없이 시련을 안겨 주었다. 

시모(媤母)가 타계한지 1년 만에 터진 6 25동란은 李씨 가문에 남아 있던 유일한 기둥이었던 시숙부(媤叔父)와 시종제(媤從弟)를 차례로 빼앗아갔다. 

가장을 잃은 두 가족은 모두 종가인 정(鄭)씨 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鄭)씨 집처럼 가난에 허덕여온 그 가족은 8명의 식구를 이끌고 찾아와 무작정 생계를 떠맡기는 것이었다. 

노동품팔이로는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친정 부모들은 “혼자 몸이니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재혼하라.”고 권유했으나 그녀는 “고생스럽지 않다.”며 웃으며 거절했다. 

친정에서 얻어온 1만원으로 시작한 포목행상은 힘겨웠으나 수입은 좋았다. 하루 1백여 리씩 산골 마을을 찾아 다니는 고달픈 행상이었으나 세 가족의 세대주라는 책임감이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했다. 

6년 동안이나 포목행상을 계속하면서도 그녀는 시조모(媤祖母)와 시부(媤父)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에 행상의 길을 떠나면서도 웃어른들께 용서를 빌었으며 귀가할 때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반드시 구입해 왔다. 

20대의 어린 나이에 세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 하는 벅찬 시련이 계속됐으나 그녀는 가문을 더럽히거나 어른들을 욕보이는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가족을 한집에서 보살펴 오면서도 단 한 번의 불화도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인 효행(孝行)을 온 가족이 실천할 수 있도록 정(鄭)씨가 솔선수범을 보인 때문이었다. 

3년 전부터는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집 모퉁이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렸다. 선조 회재(晦齋)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크게 늘어 구멍가게는 수입이 좋았다. 

가정이 해마다 안정을 되찾아 가던 2년 전에는 시조모(媤祖母)마저 별세(別世)했다. 지난해 고아원에서 고아를 입양(入養)해 가르게 된 것은 시부(媤父)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시부(媤父)는 자기의 행복을 외면한 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이제부터는 가정이 안정을 찾았으나 네 생활을 즐겨보라.”면서 고아 입양을 권유했던 것이다. 정(鄭)씨의 효성(孝誠)은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한 효(孝), 즉 추기지위서(推己之謂恕)[자기를 미루어 남을 너그럽게 위해주는 행위]를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