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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韓貞鉉) 여사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후예 한복식 씨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19세가 되던 젊은 나이에 청도군 매전면에 김영도 씨의 자부로 출가하였으나, 그때가 6·25 전쟁 중이라 남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신혼 초였다.
남편은 제주도 훈련을 마치고 일선부대로 전출하여 조국을 위해 싸우다 싸늘한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요즈음 같으면 한창 멋이나 부릴 꽃다운 나이에 청상(靑孀)이 되었으나 천성이 어질고 유교적 교육을 받은 그녀는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생활하던 중 시부모와 일가친척이 젊은 몸으로 평생을 홀로 고생시킬 수 없다며 좋은 인연을 찾아 재개하라는 여러 차례의 권유로 마음이 흔들려 나이 27세 되던 해 경산시 압량면의 박원찬 씨에게 개가를 하였다. 개가를 하고 보니 전처자식 2남 1녀가 있었고, 남편 또한 6·25 전쟁 참전 상이용사 2급으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수입이라고는 상·하반기 25,000원씩(연 50,000원) 보훈청으로부터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이것으로는 어린 남매 교육비도 안 되어 매일같이 품팔이, 삯바느질 등을 가리지 않고 하며 살아가는 동안 슬하에 1남 2녀가 출생. 8명의 대가족이 되어 어렵게 생활하던 중 2살 된 딸아이가 사망하였고, 보훈청에서 생활안정자금 융자제도가 있어 1971년 당시 돈 20만원을 융자받아 친정곳에 논 400평을 구입, 씨뿌리고 가꾸면서 살던 중 1974년 9월 남편은 6.25 전쟁에서 입은 다리 관통상이 악화되어 4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인근 직물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월급과 유족연금으로 자녀교육비와 친정노모까지 모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다.
세월은 흘러 3남 2녀도 모두 결혼 후 분가시켰으며, 8년간 다니던 직장도 사직하여 퇴직금 600만원을 수령하여 그 중 200만원을 생활이 곤란한 관내 김순희씨외 9가족에게 전달하였다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웃들은 한결같이 재벌들의 2,000만원보다 값지다고 칭찬이 자자하며, 2000년도 연말에는 경산시장의 감사패도 받았고, 2001년 1월 12일에는 남천면 번영회장(김신용)으로부터 모범 면민상을 수상한 바도 있으니, 한(韓) 여사야말로 효(孝), 열(烈), 선(善)을 겸비(兼備)한 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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