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이정아(李廷兒) 여사는 1970년 12월 6일 벽진이씨(碧珍李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1991년 남편이 근무하던 김천그랜드관광호텔에 입사하여 남편과 처음 상면했다.
서로가 호감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하던 중 1992년 1월 23일 밤 출장을 다녀와서 교통사고로 제 5경추 압박골절 및 탈구로 사경을 헤매다 목뼈를 다쳐 전신을 사용하지 못하고 와병(臥病)상태인 김진철 씨는 병원에서 8개월의 치료기간 중 몇 번 자살 기도도 했으나 노모를 생각하니 죽을 수가 없었는데, 더 큰 이유로는 한결같이 병문안을 오는 이정아 여사가 한 가닥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노모는 아들의 팔다리를 주물러 정상으로 회복시키려다가 손가락 마디가 모두 휘어졌고, 평소 앓아오던 갑상선 질환이 악화되어 후두염으로 발병한 상태로 생활이 어려웠다,
이때 이정아 여사는 많은 고민 끝에 김진철 씨와 동고동락(同苦同樂)하기로 작정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이에 김씨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지체 1급의 장애를 딛고 새 삶의 희망을 가지고 1995년 처가의 허락을 받아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여사는 혼자서 시모와 장애인 남편을 돌보며 생계를 꾸려 가던 중 비디오 가계를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아 인근의 전자공장에 다니게 되자, 남편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혼 당시 비록 고생은 되어도 마음 고생만은 시키지 않겠다던 남편의 약속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할 수 없이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몸의 통증을 잊기 위해 인터넷 바둑을 도와 주던 것을 계기로 남편이 ‘오로바둑’이라는 관리자로 취업이 되었다.
처음 입사시는 직원 5명이던 것이 '사이버오로'라 하여 회원수도 많고 직원도 20명이나 되어 남편은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할 수 있었고 생계유지도 해결되었다.
이 여사는 부부는 매일 저녁 6~7시가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날 아침 5시까지 남편이 부르면 부인이 타이핑을 하여 사이트를 관리하였다.
이처럼 힘든 생활에도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돈독하게 살며 시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니 동네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 이전글제47회 열행상(烈行賞) 이정락(李正樂) 25.07.03
- 다음글제47회 선행상(善行賞) 김진국(金鎭國) 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