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달수(李達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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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1962년 2월 24일)
독행상(篤行賞)
포항시(浦項市) 동빈로(東浜路) 2가(街) 119
효부(孝婦) 이달수(李達守) 38세

남편은 일제(日帝) 때 시부모(媤父母)와 아들 하나를 남겨둔 채 일본군에 끌려갔으나 생사(生死) 조차 모른 채 소식이 없다. 

18세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게 됐던 것이다. 64세의 시부(媤父)는 앞 못 보는 장님이었으며, 시모(媤母)는 병약해 노동 능력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던 농토는 6.25사변을 겪는 동안 생활에 쪼들려 팔아버려야 했으며, 도시에 나와 삯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은 험하고 힘들었다. 넷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단칸 셋방을 빌어 공사장의 노동일부터 시작했다. 하루 3백 원의 임금으로는 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지만 노시부모(老媤父母)에게는 한 끼의 식사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하루 한 끼로 견디면서 행상자금을 마련하기까지는 1년이나 결렸다. 시장 판을 돌며 야채, 어물, 잡화 등 닥치는 대로 행상을 벌여 놓고 병든 시부모(媤父母)를 극진히 공양했다. 

재산은 크게 늘지 않았으나 며느리의 효성(孝誠)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시부모(媤父母)와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보답하겠다는 외아들의 효도(孝道)로 가정은 언제나 화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