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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출신인 曺씨는 17세 때 19세이던 김귀동(金貴東) 씨와 결혼했다.
당시 남편은 상주농잠학교(尙州農蠶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2대 독자(獨子)인 남편은 가정형편이 고교에 진학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외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지 않겠다며 농잠학교에 진학시켰다. 학생 신랑은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탓인지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의 청년이었다. 가족이라고는 70 고령의 할머니와 50세의 과부 어머니 등 5식구뿐이었으나 남겨진 재산이 없어 언제나 쪼들리는 생활이었다. 남편은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집에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가족을 화목하게 이끌었으며 처에게도 가족의 화목을 언제나 다짐하곤 했다.
외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대부분 며느리를 질투하기 마련이다. 조(曺)씨는 외아들을 가진 어머니의 질투는 당연한 것이라는 친정 부모의 말을 가슴에 새겨왔으므로 가족의 화목을 파괴하는 저항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양잠 기술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년 남짓 남은 학창 시절을 학업에 열중하던 남편은 틈틈이 아내를 데리고 상주(尙州) 읍내를 구경시켜 주면서 앞으로의 생활설계를 펼쳐 曺씨를 행복하게 해 주곤 했다. 간혹 어머니 몰래 나이 어린 아내가 시집살이로 고생하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 과자나 과일을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 놓기도 했다.
결혼 3개월 만에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집안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2대 독자 집안에 자식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조모(媤祖母), 시모(媤母)의 정성은 극진했다. 무리한 일을 하면 펄쩍 뛰었으며 빨래마저도 못 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이 가정의 행복은 어이없게도 2대 독자가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허무하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학교에 다녀온 남편이 배가 아프다며 자리에 눕더니 다음날부터 심한 열과 구토설사를 하면서 늘어졌다.
놀란 가족들은 인근 한약방과 50여리 길을 달려가 의사를 불러 왔으나 병세는 악화될 뿐 효과가 없었다. 曺씨는 20여 일이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는 시조모(媤祖母)와 시모(媤母)를 보살피는 일까지 맡아야 했다.
남편은 발병 2년여만에 허무하게 숨지고 말았다. 2대 독자를 잃은 집안은 전쟁 뒤의 폐허와 같았다. 한 달 동안이나 식음을 마다하고 누워 있던 시조모(媤祖母)와 시모(媤母)는 17세의 어린 며느리가 부른 배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것을 보고 정신을 되찾은 듯했다. 김(金)씨 가문에 대를 끊기지 않기 위해 며느리를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3대 과부집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전답(田畓) 하나 없이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 왔던 이 가정을 이끌기 위해 남편을 잃은 지 한 달 만에 농사일에 나가야 했다.
남의 집 콩밭의 풀을 뽑으면서 눈물을 뿌리던 그녀는 배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에 희망을 걸고 슬픔을 견디어 냈다.
다음해 태어난 유복자(遺腹子)는 절망에 빠져 있던 가족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3대 과부 집에 태어난 3대 독자(獨子)는 온 가족의 희망이었다. 曺씨는 이제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구실을 얻은 것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일가(一家)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曺씨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식량을 마련했다. 엄동혹한(嚴冬酷寒)에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해 와야 했으며 찌는 듯한 삼복(三伏)더위에도 논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품삯으로 쌀이나 보리쌀 한 되를 받아 점심을 굶고 있을 시조모(媤祖母)와 시모(媤母)의 저녁상을 마련해야 했다. 밤에도 남이 잠자는 시간에 베틀에 앉아 베를 짰으며 어떤 날은 날이 훤히 새도록 베틀과 싸워 낮일 도중 과로로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 후 한 번도 친정에 다녀오지 않았으며 명절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 마을사람들로부터 ‘개미과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왕릉리(旺陵里)는 광산지대로 전국의 광부들이 철새처럼 철 따라 몰려들어 화려한 유행이 도시만큼이나 빨리 전파되는 곳.
한창 멋을 부릴 나이인 20대에 1년 내내 검정바지에 흰 블라우스 하나만으로 일에만 열중한 그녀에게 이 지대의 유행은 간혹 서러운 느낌을 들게 했으나 하루하루 늘어나는 가산을 보는 즐거움으로 화려한 유행을 뿌리칠 수 있었다.
품팔이 10년에 겨우 밭 5백 평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토여서 4식구 2달 분 식량 밖에 생산할 수 없었으나 내 땅을 갖게 됐다는 기쁨은 그 동안 겪은 슬픔과 고난을 잊게 했다.
며느리가 말없이 고난을 이겨가며 가세(家勢)를 일으키고 있는 장한 용기를 지켜본 시모(媤母)는 며느리가 베푸는 극진한 효성(孝誠)에 가슴이 메인다고 했다.
시조모(媤祖母)도 며느리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70의 고령인데도 잔병 없이 건강하게 행복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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