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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金)씨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행로는 불행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불행과 투쟁해온 김(金)씨의 굳센 의지는 오직 이(孝)와 사랑의 정신으로만 이겨낼 수 있었다.
공자(孔子)는 『효제(孝悌)는 인(仁)을 근본(根本)으로 한다』고 했다.
「휴머니즘」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인(仁)은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량하며, 부부가 사랑으로 충만 된 가정은 이웃을 사랑할 줄 안다는 옛 말은 역경을 이겨낸 김(金)씨 경우 표본일 수 있다.
김(金)씨의 고향은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城津).
성진여중(城津女中)을 졸업한 후 공산학정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노모(老母)와 월남했다.
지주계급이었던 아버지는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간 후 소식이 없어 모녀만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정착한 그녀는 고주파(高周波)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양호교사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을 잃고 고난의 피난살이를 겪어온 노모(老母)는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 그녀의 박봉은 노모(老母)의 치료비로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노모(老母)는 혼기가 다가온 딸을 출가시키기 위해 힘들여 모은 재산 일부를 정려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기만을 의지하며 희생해온 어머니 곁을 떠날 수가 없다고 버티었다.
결혼 하지 않고 노모(老母)를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그녀의 효심(孝心)이 오히려 노모를 괴롭히는 불효(不孝)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27세의 노처녀가 된 후였다.
홀어머니를 효성(孝誠)으로 봉양하고 있는 외동딸 김(金)씨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 남편을 만난 것은 그녀에게 안겨진 가장 큰 행복이었다.
월 1회씩 어머니를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한 후 남편의 근무지인 포항(浦項)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박봉의 남편을 돕기 위해 포항(浦項)에서도 양호교사로 취직, 포항(浦項)국교와 동부(東部)국교의 어린이 건강을 돌보았다.
김(金)씨를 이해하는 남편과 함께 서울에 홀로 남겨진 노모(老母)에게 월 1회 썩 반드시 찾아가 병 치료를 돕고 위로하곤 했다.
불행은 어이없게도 순간적으로 덮쳐왔다. 3년 전 2월 어느 아침이었다.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아 오던 노모가 시장 길에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학교를 조퇴한 후 남편과 함께 대구(大邱)행 급행 버스를 탄 것은 하오 2시경이었다. 눈물을 뿌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차창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버스가 뒹구는 느낌을 받은 후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의 침대 위였으며, 전신은 피투성이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녀에 비해 남편은 생명이 위독할 만큼 중증이었다. 그녀는 20일만에 퇴원할 수 있었으나, 대퇴골(大腿骨), 얼굴, 다리 등에 심한 상처를 입은 남편은 3개월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남편은 그 동안 4회의 큰 수술과 10여 차례의 작은 수술을 받았으나,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한 쪽 눈의 시력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고난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시작됐다.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긴 어머니를 서울에서 포항(浦項)으로 모셔와 두 자녀를 맡긴 후 남편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냈다. 남편이 남겨준 재산과 그 동안 저축했던 재산은 노모와 남편의 치료비로 모두 탕진돼 무(無)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아침 9시부터 하오 5시까지 6천여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은 고되고 힘겨웠으나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의 치료비를 위해 병원에 나가 시간제 간호부, 청소부 등으로 밤 12시까지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을 자주 찾아보기 위해 오후의 일은 남편이 입원한 기독의원이나, 의원 주변에서 얻었다.
결국 남편은 정상적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6개월 만에 퇴원, 집에서 돌보아야 했다.
그녀의 고난은 다음해 노모가 복막염으로 쓰러져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돼 더욱 가중돼 왔다.
집에서 남편의 식사를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낸 후 병원으로 달려가 같은 연을 되풀이 하고 학교 일을 해내야 했으며, 퇴근 후에는 수예점에서 일거리를 얻어오고 2시간 동안 가정교사 일을 맡아 하루 24시간을 뛰는 여장부가 됐다.
이같이 불행이 계속 겹쳐 와도 그녀의 표정은 사고전의 행복했던 시절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특히 학교에서는 전보다 더 열심히 어린이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으며, 사랑과 성실로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어 어린이들은 김(金)씨를 「우리학교 어머니」로 부르고 있다.
사랑과 성실, 믿음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그녀는 바쁜 남편과 노모(老母)의 병시중 속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병을 앓고 있을 때, 반드시 찾아가 치료를 돕고 위로해 주고 있다.
지난해 그녀에게 수여된 대통령 면려(勉勵)훈장은 그녀의 외로운 헌신에 작은 용기를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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