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박기순(朴基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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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1966년 2월 23일)
독행상(篤行賞)
금릉군 봉산면 지례동
열녀(烈女) 박기순(朴基順) 82세

항일투사인 시부(媤父)와 남편을 도와 일제(日帝)의 압정(壓政)에 여류투사이다. 

구한말시대 관직에 있던 시부(媤父) 이운석(李運奭) 씨는 을사(乙巳)보호조약 체결 후 관직을 던져버리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 단을 조직, 일제(日帝)에 대항했다. 

얼마 후 남편 이응수(李應洙) 씨마저 가산을 팔아 독립 단에 투신하자 집안은 하루 아침에 파산 상태에 빠져 박(朴)씨가 시모(媤母)와 3남매의 생계를 이어야 했다. 

왜경(倭警)의 감시와 학대도 심해 5차례에 걸쳐 시모(媤母)와 함께 투옥,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시부(媤父)와 남편의 은거지를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후에 시부(媤父)와 남편이 왜경(倭警)의 손에 잡혀 시부(媤父)는 옥사(獄死)했으며 시모(媤母)마저도 충격으로 별세했다. 

남편은 심한 고문으로 하반신 불수의 불구자가 돼 출옥하는 불행이 겹쳤지만 박(朴)씨는 절망하지 않고 독립단과 남편 간의 연락원(連絡員) 노릇을 계속하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남편이 재수감 된 것은 출옥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편은 9개월 만에 옥사(獄死)했다. 

시부(媤父)와 남편의 장한 뜻을 받들어 박(朴)씨는 3자녀 교육에 남은 여생을 헌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