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김하우(金夏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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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1966년 2월 23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울릉군 남면 도동
효자(孝子) 김하우(金夏佑) 75세

울릉군(鬱陵郡) 남면(南面) 도동(道洞) 양지 바른 산비탈에 화강암으로 깎아 만든 김(金)씨의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평생을 통하여 추호(秋毫)의 사욕(私愁) 없이 시종(始終) 2만 5천여 도민(島民)을 위해 봉사하여온 숭고한 박애 정신은 보세장민(輔世長民)하는 덕행(德行)이며 도민(島民)의 숭앙(崇仰)의 상징이 되어 여기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노라」 

이 송덕비는 1951년 김(金)씨가 도민(島民)을 위해 공헌한 50년간의 업적을 후세에게 남기기 위해 전도민(全島民)의 이름으로 건립한 것이다. 

金씨는 한의사(韓醫師)이다. 그가 한의사가 된 것은 순수한 박애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울릉도(鬱陵島) 개척 당시인 70년 전 개척인(開拓人)으로 들어간 아버지를 따라 울릉도(鬱陵島) 땅을 처음 밟았다. 

소년시절을 삭막한 섬에서 보내면서 그는 가난하고 소외 당한 울릉도민(鬱陵島民)을 위해 두 가지 사업을 자기가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결심한다. 

두 가지 사업이란 의료와 교육시설의 설립이다. 

당시 울릉도(鬱陵島)에는 단 한 명의 의사도 없어 섬 주민 중 환자가 발생할 경우 하늘에 회복을 기원하거나 자가 치료 밖에 할 수 없었다. 교육시설 역시 한 곳도 없어 부유한 주민 자제들만 육지로 유학을 떠났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교육 혜택을 받지 못했다. 

김(金)씨는 이 같이 소외 당한 섬 주민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8세 때 섬을 떠났다. 

그는 한의학의 본산지인 대구(大邱)에 유학 와 3년간에 걸쳐 피나는 노력 끝에 한의사 자격을 얻었다. 

그가 특히 힘들여 익힌 분야는 침술(鍼術)이다. 울릉도(鬱陵島)에는 한약재 구입이 힘들어 환자가 발생할 경우 한약에 의한 치료보다 침술치료가 빠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귀향한 그는 본격적으로 의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처음 일부 주민들은 나이 어린 그의 치료에 의문을 품고 기피하는 현상까지 보였으나 그의 침술이 뛰어난 효과를 보여주자 그의 성가(聲價)는 하루아침에 전 도민(島民)에 알려졌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고 눈이 쌓이는 날에도 울릉도(鬱陵島) 어느 곳이나 환자를 찾아 나섰다. 험한 산길을 다니다 길을 잃기도 했으며, 심한 눈보라도 진료길 도중에 동굴 속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특허 진료비에 신경을 쓰지 않아 가난한 도민(島民)에게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추앙을 받았다. 

10여년의 진료사업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자 그는 두 번째 사업인 주민교육에 전력을 겨울이기 시작했다. 향리인 남면(南面) 저동(苧洞)에 서당을 세우고 문맹(文盲) 청년들을 모아 문맹퇴치 운동을 폈다. 

그리고 더 많은 의료인을 배출하기 위해 침술지도도 동시에 실시했다. 서당은 해방과 함께 학교가 세워지게 돼 문을 닫았으나 그 동안 이 서당에서 배출한 인재는 3천명에 달한다. 

50년간 진료사업을 계속해 오는 동안 그는 많은 가난한 도민(島民)의 생명을 구했다. 그 동안 울릉도민(鬱陵島民) 중 그의 치료를 받아보지 않은 가족은 거의 없을 만큼 그의 활동은 활발했다. 섬 내 어느 지역을 가서도 金씨의 이름을 대면 선뜻 그의 공덕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섬 주민들을 사랑하는 만큼 부모(父母)에게도 효성(孝誠)을 다하고 있는 뛰어난 효자(孝子)이다. 

그의 효성(孝誠)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대구(大邱) 유학에서 갓 돌아와 열심히 진료사업을 펴고 있던 어느 날 부친(父親)이 갑자기 고열과 심한 설사를 하면서 쓰러졌다. 그는 그 동안 익힌 침술 등 한의술을 동원하여 부친(父親)을 진료했으나 부친(父親)은 오히려 하루하루 증세가 악화될 뿐이었다. 그는 자기의 의술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한탄하면서 제단(祭壇)을 차리고 자기에게 진정한 의술의 힘을 길러 주어 부친(父親)의 병을 완치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의 기원은 7개월 13일간 계속됐다. 어느 날 그로부터 침을 맞은 부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평소보다 심한 통증을 느낀 침이었는데 이날 침이 바로 부친(父親)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다. 

부친(父親)이 완치되자 이번에는 모친(母親)이 자리에 눕게 되는 불행이 겹쳐왔다. 한숨을 돌린 지 겨우 2개월 만에 그는 다시 제단(祭壇)을 차려야 했다. 이번에도 시탕(侍湯)과 침술(鍼術)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정성들여 기도를 계속하면서 치료와 간호에 전념했다. 6개월이 경과된 어느 날 모친(母親)은 갑자기 흑돔이 먹고 싶다고 했다. 한 겨울철이어서 흑돔을 구하기가 힘들자 그는 낚시를 메고 바다로 나갔다. 

혹한의 날씨에 고기가 걸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나 모친(母親)의 요구를 집 안에 앉아서 묵살할 수는 없었다. 

배를 띄운 지 2시간이 지난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기의 흔적도 없던 맑은 바다에 갑자기 팔뚝크기의 흑돔 한 마리가 배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 고기는 이내 드리운 낚시를 물어 손쉽게 잡혔다. 

모친(母親)은 이 흑돔을 끓여먹은 후 병이 서서히 회복돼 곧 완치됐다. 마을 주민들은 이 흑돔을 하늘이 감동해 내린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