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김경옥(金京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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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도개면
효부(孝婦) 김경옥(金京玉) 26세

비교적(比較的) 유복(裕福)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도시(都市)에서만 생활(生活)해 오던 김경옥(金京玉) 효부(孝婦)가 시골 청년(靑年) 김봉균씨(金奉均氏)와 결혼(結婚)한 후(後) 농촌생활(農村生活)에 젖기까지엔 숱한 역경(逆境)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가 시댁(媤宅)에 와서 놀란 것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 날 그날의 끼니마저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난과 또 하나는 매일(每日)같이 술을 마신 후 폭언(暴言)과 행패(行悖)를 일삼아 하는 시부모(媤父母)님의 태도(態度)였다. 

"시댁, 시집 잘못 왔수,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어떻게 그 고통(苦痛)을 참으면서 살아가려고 그러우?" 

그를 동정(同情)하는 동민(洞民)들의 목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갔지만 그의 태도(態度)는 단호(斷乎)하기만 했다. 

"운명(運命)과 싸워 이겨 나가자, 이 집안에서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김효부(金孝婦)의 결심(決心)은 비장(悲壯)했다. 

그는 시부모(媤父母)님의 탈선행위(脫線行爲)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와 반비례(反比例)해서, 모든 공격(攻擊)의 화살을 효성(孝誠)이란 방패로 보기 좋게 막아 버리면서, 품팔이와 막노동(勞動)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마침내 김효부(金孝婦)는 티끌 모아 태산(泰山)이란 꿈을 이루어 90여만(餘萬)원의 저축(貯蓄)까지 이룩했고, 그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구입(購入)해서 사육(飼育)하였다. 

시부모(媤傅母)님 못지않게 술과 도박(賭博)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하던 남편(男便)도 아내의 끈질긴 노고(勞苦) 끝에 감동(感動)되어 하천감시원(河川監視員)이란 일자리를 얻게 됐는데,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그의 일손은 더욱 바빠졌다.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사흘이 멀다 할 정도(程度)로 목욕(沐浴)도 시켜 드리면서 극진(極盡)한 정성(精誠)으로 간호(看護)를 했다. 

그러나 조그마치의 차도(差度)도 없이 발병(發病) 1년후(年後)에 별세(別世)하셨는데, 숨을 거두기 전(前)에 그의 시모(媤母)님은 김여사(金女史)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시어미를 용서해 다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타계(他界)하신 시모(媤母)님의 감동(感動)과는 달리 그의 시부(媤父)님은 이제 동리(洞里)사람들의 구설(口舌)에 오르내릴 정도로 폭언(暴言)과 행패(行悖)가 더욱 극심(極甚)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김여사(金女史)는 매일(每日)같이 술과 맛있는 안주로 시부(媤父)님을 달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인내(忍耐)로 이기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어느새 김여사(金女史)는 억척스럽게 일하고 악착같이 저축(貯蓄)을 해서 송아지를 사고,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사서 오늘날에 와서는 4두(頭)의 한우(韓牛)를 사육(飼育)하는 벅찬 꿈을 성취(成就)하기에 이르렀다. 

선산군수(善山郡守)로부터 효부효창장(孝婦表彰狀)을 받기도 한 김효부(金孝婦)는, 남달리 경로사상(敬老思想)도 두터워 지금껏 10여차(餘次)에 걸쳐 동리(洞里) 노인(老人)들을 모시고 조촐한 주연(酒宴)을 마련하기도 한 숨은 효부(孝婦)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