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배승근(裵承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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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금릉군 대덕면
효자(孝子) 배승근(裵承根) 15세

예(禮)의 참뜻은, 우선(于先)마음 안에 진정(眞正)한 뜻이 있음이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에, 형식(形式)보다는 성실성(誠實性)이 예(禮)의 근본(根本)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대어 자기(自己) 이익(利益)을 얻기 위해 남을 칭찬(稱讚)하는 것을 예(禮)가 아님은 물론, 오히려 상대방(相對方)에 대한 모독(冒瀆)이 될 것이다. 

예(禮)에 대한 에(例)를 들어보면 부모(父母)나 웃어른이 부르실 때 공경(恭敬)스러운 마음으로 "네"하고 대답(對答)하는 것도 하나의 예(禮)이고, 나도 배가 고프지만 내 곁에 같이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밥을 반(半) 덜어 주는 것도 하나의 예(禮)이며, 이웃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속임 없는 말이나 행동(行動)을 하는 것도 하나의 예(禮)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 예(禮)도 알뜰히 준수(遵守)하면서 효행(孝行)도 갸륵하게 실천(實踐)하고 있는 숨은 효자소년(孝子少年)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배승근군(裵承根君)이다. 

배군(裵君)의 가정(家庭)은 500여평(餘坪)의 작은 농토(農土)를 가꾸며 어렵게 살아오던 중, 1974년(年)에 그의 모친(母親)이 세상(世上)을 떠나면서 더욱 곤궁(困窮)한 생활(生活)을 해 왔다. 

이로 인(因)해 그의 형(兄)과 누나들은 학업(學業)을 중단(中斷)하고 각기(各其) 농사(農事)일과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야만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형(兄)이 당뇨병(糖尿病)으로 눕게 되어 가계(家計)를 돕는 일이 더욱 부족(不足)하게 되었다. 

마침 그의 부친(父親)이 수로장(水路場) 사업(事業)에서 막노동(勞動)을 하는 일자리를 얻게 되어 다소(多少)나마 숨통은 트이게 됐지만, 그의 형(兄)은 이제 식물인간(植物人間)에 가까울 만큼 아무 일도 못하고 병석(病席)에 눕게 되는 바람에 배군(裵君)의 일손만 더욱 바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동안 큰누나는 입 하나라도 던다는 뜻에서 출가(出嫁)를 했고, 작은누나는 생계(生計)를 돕기 위해 구미공단(龜尾工團)에 취업(就業)을 한 탓으로 자연 집안 살림은 배군(裵君)의 고사리손으로 꾸려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아침저녁의 밥 짓는 일에서부터 병석(病席)에 누워 있는 형(兄)의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심지어 형(兄)과 부친(父親)의 빨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배군(裵君)은 매일(每日)같이 학교(學校)에서 공부(工夫)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뛰어가는 것이 정상(正常)코스일 만큼 학우(學友)들과도 어울릴 수 없고 가사(家事)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한겨울에도 냇가에 나가 한 쪽 구석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눈물겹기만 하였다. 

그의 형(兄)은 끝내 아우의 따뜻한 사랑도 외면(外面)한 채 타계(他界)하고 말았는데, 이런 충격(衝擊)으로 그의 부친(父親)마저 실의(失意)에 빠져 버리자 배군(裵君)은, 

"아버지 용기(勇氣)를 잃지 마세요, 형(兄)은 어머니 곁으로 갔지만 제가 있잖아요, 제가 아버지를 지켜 드릴께요." 

이와 같이 말하면서 희망(希望)과 용기(勇氣)를 북돋아 주었다.

오늘도 아침밥을 지어서 부친(父親)께 드린 후(後), 급히 학교(學校)를 향(向)해 뛰어가고 있는 배군(裵君)은 정말 대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