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박옥순(朴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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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지천면
효부(孝婦) 박옥순(朴玉順) 36세

층층시하(層層侍下)라는 말 그대로 박옥순(朴玉順) 여사(女史)가 시집에 첫발을 들여놓고 보니 시조부모(媤祖父母)님, 시부(媤父)님, 시(媤)동생, 시(媤)누이 등 그야말로 아홉 식구(食口)의 대가족(大家族)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더우기 시부(媤父)님은 병환중(病患中)이었고, 몇 달 후(後)부터는 시조모(媤祖母)님도 노환(老患)으로 자리에 눕게 됐다. 

따라서 박여사(朴女史)는 안방(房)과 옷 방(房)을 드나들면서 간호(看護)를 해야만 했는데, 특(特)히 시조모(媤祖母)님의 간호(看護)에는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내야 하는 고역(苦役)이 뒤따랐지만, 그는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는 일 없이 하루 몇 차례에 걸친 용변처리(用便處理)는 말할 나위도 없고, 목욕(沐浴)도 매일(每日) 시키고, 옷도 매일(每日) 갈아입히는 등 3년후(年後)에 별세(別世)할 때까지 정성(精誠)을 다하여 봉양(奉養)했다. 

3년(年)동안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媤父)님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하다 보니 가정형편(家庭形便)은 말이 아니었다. 

400여평(餘坪)의 논밭으로 도저(到底)히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온 식수(食口)가 한 맘이 되어 부지(敷地)를 개간(開墾)해서 7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를 마련했다. 

천성(天性)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억척스럽기만 한 박여사(朴女史)는, 그때부터 열심(熱心)히 농사(農事)를 지어 마침내 초가삼간(草家三間)도 현대식(現代式) 와가(瓦家)로 개축(改築)했고,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도 그동안 모두 결혼(結婚)시켰으며, 그 자신(自身)도 아들딸 낳고 다복(多福)한 가정(家庭)을 꾸리게 됐다.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해온 97세(歲)의 시조부(媤祖父)님도 면내(面內) 최장수자(最長壽者)로 뽑혀 장수상(長壽賞)을 받는 등 박여사(朴女史)의 숨은 효행(孝行)은 여기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조부(媤祖父)님은 이런 효심(孝心)도 아랑곳 없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로 마구 폭언(暴言)을 퍼부으며 손부(孫婦)를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심(甚)한 노망기(老妄氣)까지 부리면서 방(房)바닥과 이불에 심지어 온 방안에다 대소변(大小便)을 보는 등으로 노망기(老妄氣)를 부렸지만, 박여사(朴女史)는 조금도 싫은 표정(表情)을 짓지 않고 때로는 막걸리로 또 어떤 때는 맛있는 간식(間食)으로 시조부(媤祖父)님의 노망기(老妄氣)를 잠재우곤 하였다. 

"세상(世上)에 저런 효부(孝婦)는 처음 보았습니다. 손부(孫婦) 면전(面前)에다 대고 욕설(辱說)을 퍼부어도 짜증은 커녕 미소(微笑)띤 얼굴로 대(對)하는 말없는 천사(天使)가 바로 박여사(朴女史)입니다." 

동민(洞民)의 말 그대로 박여사(朴女史)는 말없는 천사(天使)였다. 어느 해 겨울에는 망령기(妄靈氣)로 시조부(媤祖父)님이 어디론가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된 일도 있었는데, 그 때 박여사(朴女史)는 산(山)과 들을 헤맨 끝에 마침내 시조부(媤祖父)님을 찾아서 업고 집에 돌아오는 일도 있을 만큼, 시조부(媤祖父)는 손부(孫婦)의 속을 썩혀 주었지만 박여사(朴女史)의 표정(表情)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았다. 

그의 효행(孝行)이 널리 알려지면서 칠곡군수(漆谷郡守)의 효행상(孝行賞)을 받기도 한 박여사(朴女史)는, 어느 모로 보나 효(孝)를 위해 태어난 사람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