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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머슴살이로 생계(生計)를 이어가고 있는 가난한 농부(農夫)인 노익근씨(魯鎰根氏)와 결혼(結婚)한 배남호(裵南浩) 여사(女史)는, 불과(不過) 250여평(餘坪)의 농사(農事)로 시모(媤母)님을 모시면서 아울러 시(媤)동생도 거느려야 하는 중책(重責)때문에, 신혼초(新婚初) 몇 달 동안은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가난을 한탄(恨歎)하며 살 수 만은 없어 배여사(裵女史)도 남편 못쟎게 품팔이를 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는데, 그보다도 매일(每日)같이 술과 도박(賭博)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하는 시부(媤父)님의 탈선행위(脫線行爲)가 그의 고통(苦痛)을 더욱 가중(加重)시켰다.
오죽했으면 동민(洞民)들이 시부(媤父)님을 가리켜 늙은 망나니라는 별명(別名)까지 붙이면서 혹평(酷評)을 했을까. 배여사(裵女史)는 누구보다도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시부(媤父)님을 봉양(奉養)해 오다가 생각 끝에, 어느 날 그 녀(女)의 제의(提議)로 가족회의(家族會議)를 하였다.
"동민(洞民)들이 아버님을 멸시(蔑視)한다고 해서, 집안 식구(食口)들마저 먼 산(山)의 불 구경(求景)하듯 외면(外面)해서야 되겠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집안의 어른이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음으로 효도(孝道)를 알뜰히 하면 아버님도 잘못을 뉘우치리라고 확신(確信)합니다."
그 녀(女)의 이와 같은 호소(呼訴)는 적중(的中)하였다.
마침내 이제 감동(感動)한 시부(媤父)님도 점차 술을 끊게 됐고 도박장(賭博場)도 멀리하게 되었다.
3년후(年後) 시부(媤父)님이 별세(別世)하시자, 이번에는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됐고, 그 날부터 배여사(裵女史)의 간호(看護)가 뒤따라야만 생명(生命)을 유지(維持)할 수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매일(每日)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쳐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일에서부터, 손톱, 발톱을 깎아 드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꼬박 4년(年) 동안을 정성(精誠)들여 뒷바라지해 왔다.
이와 같은 고통(苦痛)스러운 일이 몇 해를 두고 계속(繼續)되었지만,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이나 싫은 표정(表情)도 짓지 않고 정성(精誠)껏 봉양(奉養)해 왔다.
그러나 온갖 약(藥)을 다 구(求)해다 복용(服用)토록 노력(努力)했지만 병세(病勢)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았다.
배여사(裵女史)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쪼들리는 생계(生計)를 메꾸어 나가기 위해 대구도살장(大邱屠殺場)을 드나들면서, 가축(家畜)의 내장(內臟)을 사다가 인근(隣近) 마을에 파는 행상(行商)을 시작하였다.
그가 이런 행상(行商)을 하게 된 밑바닥에는 행상(行商) 끝에 남은 내장(內臟)이나마 시모(媤母)님께 드려야겠다는 갸륵한 효심(孝心)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미에 그 여자(女子)들이라고나 할까. 배여사(裵女史)가 행상(行商)길에 나서고 집을 비울 때는 2남(男) 2녀(女)의 아들딸들이 할머니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 광경(光景)을 눈여겨 본 인근동민(隣近洞民)들의 칭찬(稱讚)은 대단하였다.
"효부(孝婦) 집에 효자(孝子)·효녀(孝女)났으니 멀지 않아 복(福) 받을 거야............"
어느 동민(洞民)의 감격(感激)어린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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