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박손열(朴孫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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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도군 풍각면
효부(孝婦) 박손열(朴孫烈) 36세

1983년(年) 5월(月)에는 풍각국민학교장(豊角國民學校長)이 수여(授與)하는 효부상(孝婦賞)을, 그리고 역시 같은 해에 또 청도군수(淸道郡守)로부터 효부표창(孝婦表彰)을 받은 바 있는 박손열(朴孫烈) 여사(女史)는, 청도군(淸道郡)이 낳은 자랑스러운 효부(孝婦)였다. 

가난한 농부(農夫)의 아내인 박여사(朴女史)는 결혼후(結婚後)지금껏 12년(年) 동안을 맹인(盲人)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시면서 남편(男便)의 뒷바라지와 네 자녀(子女)를 알뜰히 보살펴 온 그는, 효부(孝婦)인 동시(同時)에 현모양처(賢母良妻)이기도 하다.

지난 1980년(年) 11월(月) 어느 날이었다.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이 실족(失足)을 하여 2개월(個月) 동안 병석(病席)에 눕게 됐는데, 이 때 박여사(朴女史)는 모든 가사(家事)를 뒤로 제쳐놓고, 꼬박 시모(媤母)님 곁에 지켜 앉아 정성(精誠)을 다해 간호(看護)를 했다. 

그 때 그는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내기도 했고, 그리고 병자(病者)의 허탈감(虛脫感)을 해소(解消)시켜주기 위해서 고사(故事)와 전설(傳說)을 들려 주는 등 최선(最善)을 다해서 극진히 봉양(奉養)했다. 

"어머님 제가 방금 밖에 나갔다 오다가 심청(沈淸)이를 만났는데요, 어머님 안녕하시냐고 안부(安否)를 묻데요. 호호"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이 소외감(疏外感)을 느끼지 않도록 웃기기도 잘 했다.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가 호전(好轉)되어가자, 그는 매일(每日)같이 지방이 구실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을 이리저리 모시고 다니기도 했다.

농번기(農繁期)에 아무리 일손이 바빠도, 점심(點心) 때는 꼭 집으로 달려가서 상(床)을 차려 드린 다음에야 다시 돌아와 일을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모두가 원두막에서 비를 피(避)하고 있었는데, 박여사(朴女史)는 쏟아지는 폭우(暴雨)도 아랑곳 않고 소나기 속을 집으로 달려가 시모(媤母)님께 점심(點心)을 차려 드리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보이기도 했다. 

그 날 박여사(朴女史)는 비를 흠뻑 맞고 심(甚)한 감기(感氣)에 걸렸으나, 일절내색(一切內色)을 하지 않고 있다가 끝내 시모(媤母)님께 발각(發覺)되고야 말았다. 

"글쎄 어머님 때문에 제가 감기(感氣)에 걸린 게 아닙니다. 제가 기침을 하고 있는 것은 목에 생선가시가 걸렸기 때문이라니까요." 그의 시모(媤母)님은 비록 앞 못 보는 장님이긴 했지만, 그 정도(程度)의 잔꾀로는 통(通)하지 않았다. 

"이 시어머니 때문에 너까지 쓰러지겠어, 약(藥)을 먹고 자리에 눕도록 해라." 시모(媤母)님은 이와 같이 간곡히 권(勸)했지만, 박여사(朴女史)는 고집(固執)을 부리면서 끝내 다시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시모(媤母)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지팡이 구실도 해야 하는 박여사(朴女史)는 정말 너무나 고달프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천성(天性)이 그랬듯이, 언제나 상냥하고 자애(慈愛)로운 미소(微笑)를 입가에 머금고 시모(媤母)님에게 그가 지닌 효심(孝心)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충(忠)·효(孝)·예(禮)' 바로 이 세 글자를 자녀(子女)들에게 가훈(家訓)으로 주고 싶다는 박여사(朴女史), 그의 자녀(子女)들도 어머니가 걸어온 효(孝)의 길을 열심(熱心)히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