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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處女) 때부터 효녀(孝女)로 불려온 전정희(全貞姬) 여사(女史)는, 그가 출가(出嫁)한 후(後)에도 다시 효부(孝婦)로 칭송(稱頌)받을 만큼 그는 예나 지금이나 효(孝)를 위해 태어나고 효(孝)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슬하(膝下)에 두 자녀(子女)를 두고 그런 대로 행복(幸福)하게 살아온 전여사(全女史)는, 1979년(年) 갑자기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스러져 눕게 되던 날, 남편(男便)의 손을 붙잡고 이와 같이 말하면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
"여보, 병(病)든 어머님은 우리가 모십시다. 우리가 정성(精誠)껏 보살펴 드리면 어머님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거예요, 막내아들이라고 어머니를 모시지 말라는 법(法)은 없잖아요?"
그의 남편(男便)은 두말 않고 승락(承諾)을 했고, 다음 날부터 병(病)든 시모(媤母)님은 막내아들 내외(內外)가 모시기로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위로 맏아들인 장남(長男)을 비롯하여 차남(次男)과 삼남(三男) 등 3명(名)의 형(兄)님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 모시는 일을 이런저런 이유(理由)들로 기피(忌避)하는 눈치여서 재빨리 전여사(全女史)가 결단(決斷)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때 그 녀(女)의 나이 27세(歲)였는데, 젊음도 아랑곳 않고 매일(每日) 매일(每日)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고통(苦痛)스러운 일에서부터 조석반(朝夕飯)을 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했다.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은 마을로 메아리쳐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으례 전여사(全女史)의 화제(話題)로 꽃을 피웠다.
"글쎄, 맏며느리도 아니요, 둘째 며느리도 아닌 그렇다고 셋째 며느리도 아닌 막내며느리가, 병(病)든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대소변(大小便) 뒷바라지까지 다하고 있다니 정말 놀랄 일이 아니우?" 이와 같이 말하면서 전여사(全女史)의 숨은 효행(孝行)을 극구(極口) 칭찬(稱讚)했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과 인간(人間)의 지성(至誠)이 합쳐서 일어나 기적(奇蹟)이라고나 할까. 기동불능(起動 不能)이었던 시모(媤母)님이 하루가 다르게 병세(病勢)가 회복(恢復)되면서 바깥 출입(出入)도 하게 되었다.
순간(瞬間) 너무나 감격(感激)스러워 전여사(全女史)와 그의 시모(媤母)님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아가야, 참말로 고맙데이, 니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이 다 죽어가는 이 늙은이를 살렸다카이."
김여사(金女史)가 베풀어 준 효성(孝誠)이 오죽이나 고마웠으면 바깥 외출(外出)을 하게 된 첫날 그렇게도 좋아하시며 울었으랴.
김여사(金女史)는 동리(洞里) 어른들에 대(對)해서도 시모(媤母)님께 바치는 효성(孝誠)못지않게 경로사상(敬老思想)의 참뜻을 평소(平素)에도 행동(行動)으로 보여 주었다.
특(特)히 김여사(金女史)는 마을에서 길흉사(吉凶事)가 있을 때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했다.
집안 봉제사(奉祭祀)도 김여사(金女史) 부부(夫婦)가 모시고 있을 만큼, 조상(祖上)을 섬기고 웃어른을 모시는 일에는 언제나 욕심(慾心)이 대단했다.
그래서 어느이웃 사람은 이렇게 말을 했다.
"효(孝)에 한(限)해서는 놀부 뺨칠 정도로 욕심(慾心)이 많다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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