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손태조(孫泰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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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월성군 견곡면
효부(孝婦) 손태조(孫泰祚) 36세

손태조(孫泰祚) 여사(女史)는 그가 19세(歲) 때 소아마비(小兒痲痺)인 불구(不具)의 서정기씨(徐正基氏)와 결혼(結婚)을 하였는데, 시가(媤家)에서는 늙으신 시조부(媤祖父)님과 시조모(媤祖母)님이 그를 맞아 주었다. 

그의 남편(男便)이 19세(歲)때 양친(兩親)이 모두 별세(別世)하니, 그의 남편(男便)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품에서 성장(成長)해 왔다. 그런 연유(緣由)때문일까. 시조모(媤祖母)님의 위세(威勢)는 겁이 날 정도로 당당(堂堂)하였다. 

"얘, 아가야. 밥상(床)이 이게 뭐냐? 이걸 반찬이라고 내 놨어? 너 시(媤)할미를 이렇게 깔보기냐?" 

시조모(媤祖母)님의 괴팍스러운 본성(本性)은, 결혼(結婚) 다음 날부터 당장 나타날 정도(程度)로 손여사(孫女史)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그는 모든 것을 꾹 참고 무조건(無條件) 순종(順從)하면서 살아갔다. 

시조모(媤祖母)님의 성격(性格)이 오죽 괴팍스러웠으면 인근주민(隣近住民)들까지 외면(外面)하였을까. 남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해도 손여사(孫女史)만은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극진(極盡)한 정성(精誠)으로 두 어른을 봉양(奉養)했으며, 옷을 갈아입는 일에서부터 목욕(沐浴)을 하는 일에 이르도록,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정성(精誠)을 기울여 보살펴 드렸다. 

그리고 외출(外出)할 때나 귀가(歸家)할 때는 꼭 사유(事由)를 아뢰고, 또한 시조부모(媤組父母)님께서 병환(病患)이 났을 때는 백방(百方)으로 뛰어다니면서 약(藥)을 구(求)해다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놀리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대소변(大小便)도 손수 받아내어 깨끗하게 처리(處理)하기도 했는데, 특(特)히 약(藥)의 효험(效驗)을 감별(鑑別)하고 확인(確認)하기 위해서 시조모(媤祖母)님이 대변(大便)의 맛을 혀로 알아보기도 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상(世上)에 아무리 효행(孝行)이라는 게 중요(重要)하긴 하지만, 시조모(媤祖母)님의 똥맛을 혀로 감정(鑑定)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심청(沈淸)이가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효녀(孝女)라고는 하지만, 그도 그런 일은 못했을 것이다. 손여사(遜女史)야말로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이다."라는 동민(洞民)의 말 그대로, 그의 효행(孝行)은 하늘과 땅이 모두 놀랄 정도였다. 

끝내 시조모(媤祖母)님은 9년여(年餘)만에 걸친 병고(病苦)끝에 별세(別世)하였는데, 그가 숨을 거둘 때 손부(孫婦)의 손을 잡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 후(後) 손여사(孫女史)는 시조모(媤祖母)님께 못다한 효성(孝誠)을 시조부(媤祖父)님께 바치기로 다짐하고, 더욱 놀라운 정성(精誠)으로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면서 불구(不具)의 남편(男便)에게도 불편(不便) 한 일이 없도록 봉사(奉仕)하였다. 

손여사(孫女史)의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은, 마침내 마을 자체(自體)에서 마련한 효부상(孝婦賞)을 수상(受賞)하기도 했는데, 그의 확일(確一)한 핏줄인 쌍둥이아들 형제(兄弟)도 시상식(施賞式)이 있던 그 날, 어머니의 가슴에 꽃을 달아 주는 등, 마을 전체(全體)가 잔치 기분(氣分)으로 들떠 있었다 한다. 

그 날의 기쁨이 오죽했으면, 시조부(媤祖父)님이 둥실둥실 춤까지 추면서 감격(感激)의 눈물을 흘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