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정귀서(鄭貴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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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일군 대송면
효부(孝婦) 정귀서(鄭貴余) 44세

17세(歲) 어린 나이에 결혼(結婚)한 정귀서(鄭貴余) 여사(女史)는, 달콤한 신혼생활(新婚生活)의 꿈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시부모(媤父母)님의 봉양(奉養)과 시(媤)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일들이 더욱 걱정이 되기만 했다. 

비록 쪼들리는 살림이긴 했지만, 그 동안 시(媤)동생들도 모두 결혼 후(結婚後) 분가(分家)를 시켰고, 그러는 사이에 그에게도 4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두게 되었다. 

쥐꼬리만한 남편(男便)의 월급(月給)으로 대가족(大家族)의 살림을 꾸려 나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또순이 못지않게 쪼개고, 또 쪼개서 많은 경사(慶事)를 모두 무사(無事)히 치러냈던 것이다. 

"참으로 부지런한 여성(女性)입니다. 그러니까 가정(家庭)을 그만큼이라도 유지(維持)해 나가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웃어른에 대(對)한 효성(孝誠)은 또 얼마나 지극(至極)하다구요, 모르긴 해도 세상(世上)에 그런 효부(孝婦)는 드물 것입니다." 

인근주민(隣近住民)의 칭찬(稱讚)그대로, 정여사(鄭女史)는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였다. 

지금부터 10년전(年前), 그의 시모(媤母)님이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지면서 기동불능(起動不能)이 되었고, 급기야는 벙어치처럼 말도 못하는 딱한 처지(處地)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껏 대소변(大小便) 치닥거리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꼬박 곁에 지켜 앉아서 식사(食事)시중을 드는 등,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은 하나에서 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이 병석(病席)에 누운지 2년여(年餘)만에, 이번에는 78세(歲)에 이른 시부(媤父)님이 노환(老患)으로 자리에 누우면서 딱하게도 맹인(盲人)의 신세(身勢)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정여사(鄭女史)는 그 날부터 두 분의 중환자(重患者)를 돌봐야 하는 어려운 처지(處地)를 맞게 됐지만, 한 마디의 불평(不平)이나 불만(不滿)을 나타내는 일 없이 정성(精誠)을 모두 기울여 간호(看護)에 임(臨)하였다. 

특(特)히 앞 못 보는 시부(媤父)님을 위해서는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여 조금도 불편(不便)한 일이 없도록 최선(最善)을 노력(努力)을 다하였다. 

시부모(媤父母)님이 모두가 날마다 기분(氣分)이 내키는 대로 방뇨(放尿)하는 탓으로 이부자리가 항상(恒常) 불결(不潔)했지만, 더럽혀진 이부자리를 단 한 시(時)라도 방치(放置)하는 일 없이, 수시(隨時)로 세탁(洗濯)해서 갈아놓는 정여사(鄭女史)의 깔끔하고 갸륵한 성품(性品)은 타고난 천성(天性)이라고나 할까? 장병(長病)에 효자(孝子)없다는 옛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두분 모두를 10년(年)을 하루같이 정성(精誠)을 다하여 알뜰히 보살펴 왔다. 

그 동안 남편(男便)의 실직(失職)과 정여사(鄭女史) 자신(自身)의 고질병(痼疾病)인 기관지염(氣管支炎) 등으로 눈물겹기만 한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모든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과 용기(勇氣)로 이겨나갔다. 

그의 갸륵한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면서 영일군수(迎日郡守)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한 정여사(鄭女史)는 오늘도 한 방(房)에 나란히 누워 있는 중환자(重患者) 곁에 꼬박 지켜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고기반찬을 해 드려야 할 텐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