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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歲) 어린 나이에 결혼(結婚)한 정귀서(鄭貴余) 여사(女史)는, 달콤한 신혼생활(新婚生活)의 꿈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시부모(媤父母)님의 봉양(奉養)과 시(媤)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일들이 더욱 걱정이 되기만 했다.
비록 쪼들리는 살림이긴 했지만, 그 동안 시(媤)동생들도 모두 결혼 후(結婚後) 분가(分家)를 시켰고, 그러는 사이에 그에게도 4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두게 되었다.
쥐꼬리만한 남편(男便)의 월급(月給)으로 대가족(大家族)의 살림을 꾸려 나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또순이 못지않게 쪼개고, 또 쪼개서 많은 경사(慶事)를 모두 무사(無事)히 치러냈던 것이다.
"참으로 부지런한 여성(女性)입니다. 그러니까 가정(家庭)을 그만큼이라도 유지(維持)해 나가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웃어른에 대(對)한 효성(孝誠)은 또 얼마나 지극(至極)하다구요, 모르긴 해도 세상(世上)에 그런 효부(孝婦)는 드물 것입니다."
인근주민(隣近住民)의 칭찬(稱讚)그대로, 정여사(鄭女史)는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였다.
지금부터 10년전(年前), 그의 시모(媤母)님이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지면서 기동불능(起動不能)이 되었고, 급기야는 벙어치처럼 말도 못하는 딱한 처지(處地)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껏 대소변(大小便) 치닥거리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꼬박 곁에 지켜 앉아서 식사(食事)시중을 드는 등,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은 하나에서 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이 병석(病席)에 누운지 2년여(年餘)만에, 이번에는 78세(歲)에 이른 시부(媤父)님이 노환(老患)으로 자리에 누우면서 딱하게도 맹인(盲人)의 신세(身勢)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정여사(鄭女史)는 그 날부터 두 분의 중환자(重患者)를 돌봐야 하는 어려운 처지(處地)를 맞게 됐지만, 한 마디의 불평(不平)이나 불만(不滿)을 나타내는 일 없이 정성(精誠)을 모두 기울여 간호(看護)에 임(臨)하였다.
특(特)히 앞 못 보는 시부(媤父)님을 위해서는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여 조금도 불편(不便)한 일이 없도록 최선(最善)을 노력(努力)을 다하였다.
시부모(媤父母)님이 모두가 날마다 기분(氣分)이 내키는 대로 방뇨(放尿)하는 탓으로 이부자리가 항상(恒常) 불결(不潔)했지만, 더럽혀진 이부자리를 단 한 시(時)라도 방치(放置)하는 일 없이, 수시(隨時)로 세탁(洗濯)해서 갈아놓는 정여사(鄭女史)의 깔끔하고 갸륵한 성품(性品)은 타고난 천성(天性)이라고나 할까? 장병(長病)에 효자(孝子)없다는 옛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두분 모두를 10년(年)을 하루같이 정성(精誠)을 다하여 알뜰히 보살펴 왔다.
그 동안 남편(男便)의 실직(失職)과 정여사(鄭女史) 자신(自身)의 고질병(痼疾病)인 기관지염(氣管支炎) 등으로 눈물겹기만 한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모든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과 용기(勇氣)로 이겨나갔다.
그의 갸륵한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면서 영일군수(迎日郡守)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한 정여사(鄭女史)는 오늘도 한 방(房)에 나란히 누워 있는 중환자(重患者) 곁에 꼬박 지켜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고기반찬을 해 드려야 할 텐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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