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정순남(鄭順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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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청기면
효부(孝婦) 정순남(鄭順南) 42세

지금으로부터 22년전(年前) 19세(歲)의 나이로 빈농(貧農)의 아들과 결혼(結婚)한 정순남(鄭順南)여사(女史)는, 시집온 첫날부터 시모(媤母)님 봉양(奉養)이 지극(至極)하고 남편(男便)공경(恭敬)함이 정성(精誠)스럽기만 해 인근주민(隣近住民)들로부터 많은 칭찬(稱讚)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렇다고 생활(生活)에 여유(餘裕)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전(山田)갈이 하는 농사(農事)와 날품팔이로 손발이 부르트는 몹시 고된 가난한 살림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평(不平)한 마디 없이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식구(食口)들을 보살펴 오면서 짜임새 있게 생활(生活)을 꾸려 나갔다. 

그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일을 했던지, 결혼(結婚) 8년만에 600여평(餘坪)에 달하는 전답(田畓)도 마련할 수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비운(悲運)의 서막(序幕)은 바로 이 무렵부터 열리시 시작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고 남편(男便)이 남의 빚 보증(保證)을 잘못 서서 하루아침에 가산(家産)을 모두 날려 버리고 빈 털털이가 된 기막힌 사연(事緣) 때문이었다. 

그 때 온 식구(食口)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실의(失意)와 절망감(絶望感)에 빠져 며칠 동안 식사(食事)까지 전폐(全廢)했다. 

이로 인(因)해 남편(男便)은 매일(每日)같이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여사(鄭女史)는 자신(自身)마저 좌절(挫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순 없었다. 

"여보, 쓰러지지 말고 일어나 봅시다. 피눈물 나는 고생(苦生)도 참으면서 살아왔는데, 여기서 주저앉으면 어떻게 해요?" 

이와 같은 정여사(鄭女史)의 끈덕진 설득(說得)으로, 남편(男便)은 술도 끊어 전(前)과 같이 마음잡고 일에 열중(熱中)하였다. 그로부터 3년후(年後)에 시모(媤母)님께서 갑자기 병환(病患)으로 눕게 되자, 온갖 정성(精誠)과 좋다는 약(藥)은 모두 시탕(侍湯)하여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했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인 듯 시모(媤母)님은 끝내 불쌍한 맹인(盲人)이 되고 말았다. 

그 날부터 정여사(鄭女史)는 시모(媤母)님을 위해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또한 지팡이가 되기도 하면서 정성(精誠)을 다해 봉양(奉養)했다. 

그리고 수시(隨時)로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을 이리저리 모시고 다니면서 세상(世上) 돌아가는 풍물(風物)을 귀로나마 들려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비운(悲運)의 꼬리는 그 다음 해에도 이어졌으니, 그것은 곧 남편(男便)마저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된 기막힌 사연(事緣)이 그 꼬리에 정체(正體)였다. 

따라서 가난은 더욱 깊은 함정(陷穽)에서 헤어날 수 없을 만큼 비참(悲慘)해지기 시작했고, 4남(男) 2녀(女)의 자녀(子女)들은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게 되었다. 

날품팔이와 행상(行商)등을 하면서 남편(男便)을 살려 보려고 모진 애를 써 보았지만, 남편(男便)은 끝내 41세(歲)의 젊은 나이로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남편(男便)의 죽음으로 너무나 큰 충격(衝擊)을 받은 정여사(鄭女史)는, 최후(最後)의 수단(手段)으로 자살(自殺)이란 두 글자를 머리 속에 그려 보기도 했지만 죽음으로 해결(解決)될 문제(問題)도 아니었다. 

실의(失意)와 절망(絶望)을 과감히 딛고 일어선 정여사(鄭女史)는, 시모(媤母)님과 슬하(膝下)의 6남매(男妹)를 위해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으로 나서서 그 날부터 열심(熱心)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꼬박 11년(年) 동안,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보살펴 오면서, 하늘 아래 둘도 없는 효부(孝婦)구실을 다해 오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장(壯)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