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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매(男妹) 가정(家庭)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와서 가난한 살림을 도맡아 꾸려오면서, 한편으로 착하고 올바른 예절(禮節)로 화목(和睦)의 꽃을 피게 한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유명수(柳明洙) 여사(女史)이다.
결혼후(結婚後) 시가(媤家)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유여사(柳女史)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앞을 못보는 시모(媤母)님이었다.
20여년전(餘年前)부터 병(病)을 얻어 실명(失明)하게 된 시모(媤母)님은, 마치 눈이나 뜬 사람처럼 유여사(柳女史)의 손을 덥썩 잡고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손이 이렇게 따스한 것을 보니 마음도 따뜻하겠구나."
시모(媤母)님이 말씀 그대로 유여사(柳女史)는 마음 고왔고 행실(行實)도 착하였다.
앞 못보는 시모(媤母)님을 위해서 단 한 시(時)도 신경(神經)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다 시부(媤父)님마저 노환(老患)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어 그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이제 두 분 모두 노환(老患)으로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내야만 했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앉을 때도 유여사(柳女史)의 손이 필요(必要)했다.
시부(媤父)님의 용변처리(用便處理)를 하기가 바쁘게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는 등, 그야말로 잠시도 쉴 사이가 없을 만큼 진종일 병석(病席)을 지켜야만 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4남매(男妹)의 자식(子息)들 뒷바라지와 읍사무소(邑事務所)에 근무(勤務)하는 남편(男便)도 알뜰히 받들어야 했기에 그의 몸은 항상(恒常) 솜처럼 나른하기만 했지만, 조금도 피곤(疲困)해 하는 기색(氣色)이나 짜증스러운 표정(表情)을 짓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어려운 역경(逆境)을 이겨나갔다.
그의 보살핌이 얼마나 정성(精誠)스러웠으면 어느 날 시부(媤父)님이 병석(病席)에서 이런 말씀까지 하였을까.
"아가야, 단 하루라도 좋으니 여행(旅行)이라도 다녀오너라. 만약(萬若) 네가 이 시아버지의 말을 거역(拒逆)한다면 나는 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겠다. 내 말 알아 듣겠느냐."라고.
그렇다고 해서 여행(旅行)길을 떠날 유여사(柳女史)는 절대(絶對)아니었다. 끝내 그의 시부(媤父)님은 지극(至極)하고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발병(發病) 3년(年) 5개월(個月)만에 유명(幽明)을 달리하고야 말았다.
'그렇다. 시부(媤父)님께 못다 바친 효심(孝心)을 시모(媤母)님께 바쳐야 한다.' 유여사(柳女史)는 이와 같이 혼자 다짐하면서 시모(媤母)님 봉양(奉養)을 위해 더욱 극진한 효성(孝誠)을 다하여,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 만큼 효행(孝行)의 심도(深度)를 높여가며 봉양(奉養)하였다.
특(特)히 지난 1980년(年)부터 지금껏 4년(年) 동안 매년(每年) 어버이날만 되면, 인근(隣近) 노인(老人) 20여명(餘名)을 모셔다 조촐한 위안(慰安)잔치를 베풀기도 한 유여사(柳女史)는, 1983년(年) 10월(月) 의성군수(義城郡守)가 수여(授與)하는 자랑스러운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한 의성군(義城郡)이 낳은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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