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조화춘(趙花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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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달성군 화원면 성산동
효부(孝婦) 조화춘(趙花春 56세

삭월세(朔月貰) 단간방(單間房)에서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 그리고 슬하(膝下)의 5남매(男妹)와 더불어 근근 생활(生活)해 온 조화춘(趙花春)여사(女史)는, 고생(苦生)을 타고난 사람처럼 그의 고난(苦難)의 길은 끝없이 계속(繼續)되었다. 

그 첫 번째 시련(試鍊)은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자리에 눕는 시모(媤母)님의 노환(老患)이었다. 

매일(每日)같이 이런 저런 시중을 들면서 간호(看護)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쏟으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말없이 꾸려나간 조여사(趙女史)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男便)의 결핵병(結核病)으로 이중삼중(二重三重)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결핵(結核)은 다른 병(病)과 달리 전염성(傳染性)이 강(强)한 병(病)이어서 매일(每日)같이 환자(患者)의 방을 청결(淸潔)하게 하는 데 힘을 썼고, 결핵(結核)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두메산골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오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또 한편으로는 시부(媤父)님도 불편(不便)치 않게 보살펴야 하는 탓으로, 조여사(趙女史)는 단 하루도 두 다리를 평(平)히 뻗고 잘 날이 없을 만큼,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간병(看病)하는 일이 하루 일과(日課)의 전부(全部)였다. 

그러던 1975년(年) 1월(月), 조여사(趙女史)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시부(媤父)님은 영원(永遠)히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여가장(女家長)으로서 가정(家庭)을 이끌어 가야 할 조여사(趙女史)는, 더욱 굳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품팔이와 막노동(勞動)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나갔다. 

그가 얼마나 억척스럽게 살아왔는지는, 그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3남매(男妹)를 모두 결혼(結婚)시켜 행복(幸福)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한 것 하나만 보아도 인고(忍苦)의 숨은 결실(結實)을 알 수 있으리라. 

특(特)히 시모(媤母)님은 남달리 술을 즐겨 마시는 애주가(愛酒家)였는데, 지금까지 단(單)하루도 빠지는 일 없이 술을 꼭 마련해 드리는 등,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은 마을의 심심찮은 화제(話題)가 되고 있었다. 

작년(昨年)의 일이었다 한다. 시모(媤母)님이 병환(病患)으로 자리에 눕게 됐을 때, 공교롭게도 조여사(趙 女史)도 쌓이고 쌓인 피로(疲勞)로 인(因)해 쓰러져서 응급치료(應急治療)를 받아야 할 형편(形便)이었지만, 그런 내색(內色)은 조금도 하지 않고 시모(媤母)님 곁에서 밤을 꼬박 새워 간호(看護)한 일도 있었다. 

이 때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그에게, "시모(媤母)님도 중(重)하지만 그러다 아주머니가 먼저 쓰러져서 죽겠수. 시모(媤母)님 병(病)은 적당히 돌보고, 아주머니 건강(健康)은 아주머니 자신(自身)이 생각해요. 하다못해 보약(補藥) 한 첩이라도 먹도록 해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조여사(趙女史)의 딱한 처지(處地)를 동정(同情)했지만 그의 대답(對答)은, 

"차라리 내가 병(病)들고 그 대신(代身) 시(媤)어머님이 속(速)히 일어나시면 좋겠수. 시모(媤母)님을 제쳐놓고 제가 보약(補藥)을 먹다니? 천벌(天罰)받을 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말아요."라 하였다. 

이 한 마디만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자애(慈愛)에 넘치는 조여사(趙女史)의 효성(孝誠)이야말로 인간애(人間愛)의 참 표본(標本)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