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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先祖)들이 남긴 기록(記錄)을 들추어 보면 부모(父母)가 중병(重病)에 걸려 약석(藥石)의 효험(效驗)이 없을 때는 신명(神明)에게 기도(祈禱)를 올리는 것은 물론(勿論), 스스로 허벅지와 살을 베어서 올린다든가 손가락을 잘라 선혈(鮮血)을 입에 넣어 드림으로써 그 병(病)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傳)해 내려오고 있는데, 여기 이에 못지않게 옛날 효녀(孝女) 심청(沈淸)과 같은 갸륵한 효부(孝婦)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복생(金福生) 여사(女史)이다.
남편(男便)과 열심히 농사(農事)에 종사(從史)하면서 2남(男) 1녀(女)를 키워 온 김여사(金女史)는, 지난 1972년(年)부터 노환(老患)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91세(歲)의 시모(媤母)님을 그 자신(自身)이 맹인(盲人)이 된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오늘날까지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해 오고 있다.
농사(農事)일로 매일(每日)같이 바쁜 일손임에도 불구(不拘)하고, 하루 일과(日課)의 모든 시간(時間)을 시모(媤母)님 곁에 지켜 앉아서 시봉(侍奉)하고 있는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은, 이틀이 멀다 하고 깨끗하게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 일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비단 목욕(沐浴)뿐만 아니라, 매일(每日) 되풀이 되는 식사(食事)때마다 한 술 두 술씩 떠먹여 드리는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이나, 대소변(大小便) 치닥거리의 고역(苦役)스러운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방(房) 안에만 있다 보면 건강(健康)에 해롭다 하여 수시(隨時)로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동리(洞里)를 한 바퀴 돈다든가, 그렇쟎으면 산(山)언덕까지 모시고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듬뿍 쐬어 드리기도 하는 등, 극진(極盡)한 그의 효성(孝誠)은 하늘도 탄복(歎服)할 정도였다.
또 때때로 건강(健康)과 장수(長壽)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어다가 정성(精誠)껏 달여서 복용(服用)토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에는 그의 시모(媤母)님이 종기(腫氣)로 고통을 받고 있자 김여사(金女史)의 입으로 환부(患部)를 빨아서 통증(痛症)을 덜어 드리기도 했다.
이것을 목격(目擊)한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저렇게 극진히 봉양(奉養)하니 장수(長壽)할 수 밖에.... 모르긴 해도, 그 노인(老人)은 100세(歲)를 훨씬 넘기면서 천수(天壽)를 다할 거야." 라고 김여사(金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을 극구(極口) 찬양(讚揚)하면, 이를 겸손(謙遜)하게 사양(辭讓)하면서 김여사(金 女史)는 그에게 칭송(稱頌)이 날아올 때마다
"자식(子息)된 도리(道理)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집집마다 마을마다 미풍양속(美風良俗)이 토착화(土着化)되어, 사람마다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웃어른을 공경(恭敬)하는 풍토(風土)를 조성(造成)하게 되면 그 때 비로소 명랑(明朗)한 사회(社會)가 이루어진다."는 말도 잊지 않고 강조(强調)할 만큼 그가 지닌 효도관(孝道觀)은 지극(至極)하기만 했다.
김여사(金女史)는 부녀회(婦女會) 활동(活動)에도 많은 공헌(貢獻)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로(敬老) 잔치를 베풀 때마다 앞장서서 일하기도 했고, 생활개선사업(生活改善事業)에도 눈부신 실적(實績)을 올려 지금에 와서는 어느 마을 못지 않는 '앞서가는 마을'로 발돋움을 했다고 한다.
91세(歲)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돌보면서, 때로는 손이 되고 때로는 발이 되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김여사(金女史)는, 오늘도 시모(媤母)님을 등에 업고 바깥 바람을 쐬기 위해 급(急)히 외출(外出)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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